뎃포와 무뎃포 - 이명우
뎃포는 한자어로 철포(鐵砲)라고 쓰고 일본말로 뎃포라고 읽는다. 무뎃포는 무철포(無鐵砲)로 쓰고 무뎃포로 읽는다.
임진왜란 당시 조령(鳥嶺 : 문경세제)을 통과하는 일본군은 분명히 매복이 있을거라 두려워하며 매우 조심하면서 통과한다. 그리고 맞이하는 충주전투에서 신립장군은 배수의 진을 치고 일본군을 맞이하여 싸우지만, 조총부대의 화력을 견디지 못하고 패하여 장렬하게 전사한다. 조령의 매복 작전을 선택하지 않고 평지에서 배수의 진을 친 전술을 두고 많은 이야기가 분분하다.
우리는 그 동안 역사서나 교과서에서 '신립장군이 탄금대에서 배수진을 치고 왜적과 맞서 싸웠지만, 중과부적으로 패하고, 물에 뛰어들어 자결했다'라고 배웠습니다. 현지의 안내판과 비문, 순절비 등에도 모두 '신립장군의 8천 병력이 배수진을 쳤으며, 최후를 마친 곳'이라고 적어놓았습니다.(중략)
그러나 사실이 아닙니다. 신립장군이 배수진을 친 곳은 탄금대가 아니라 지금의 충주 건국대 캠퍼스 서쪽의 '모래시들' 일대 입니다. 여기를 비워두면 왜적이 바로 한양으로 향하는 길이 무방비로 열리기 때문입니다.(중략)
신립장군이 문경세재를 지키지 않은 이유에 대해서 많은 사람이 '신립이 험준한 조령을 막지 않아서 패했다'며 신립 장군을 졸장(拙將)이라고 인식하는데, 당시 정치인들이 패전의 책임을 일선 지휘관에게 미루기 위해 조령방어를 무척 강조했다는 의심을 지울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당시 조령에 우회로가 있다는 건 당시 사람들이 다 아는 사실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신립이 조령을 방어하지 못했다며 지금까지 비난받아 온 것이 과연 타당한지 따져 볼 필요가 있습니다.
1592년 임진왜란이 발발했다. 일본군과의 결전에 나선 신립의 조선군은 정예 기병을 주력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기병이 위력을 발휘할 수 있는 평기를 전장으로 택한 것은 어찌 보면 합리적 선택일 수도 있다. 기마병의 최대 장점은 기동력과 돌파력이다. 적이 보유한 무기의 최대 사거리 언저리에서 빠르게 이동하는 마상(馬上) 활쏘기로 적의 예봉을 꺾은 후 단숨에 전선을 돌파하여 적진을 교란시키고 진영을 붕괴시키는 것이 조선 기병의 전법이었다.
일본군은 이러한 전법을 잘 알고 있었고, 그에 대항하기 위한 솔루션을 예비하고 있었다. 약체로 위장한 중앙군을 전면에 내세우고 좌우에 주력군을 매복시킨 다음, 조선의 기병을 방심시켜 깊숙이 끌어들이고는 3각 화망(火網)을 형성하여 집중사격함으로써 500명의 조선 기병을 제압하였다. 정예병인 기병이 제압되자 급조된 나머지 보조군은 그저 살육전의 사냥감 신세에 불과했다.
탄금대 전투 이전에 일본에서는 이와 매우 유사한 전투가 벌어진 적이 있다. 오다 노부나가가 천하통일의 고삐를 바짝 당기는 계기가 된 ‘나가시노 전투(長篠の合戰)’이다.
1573년 천하통일을 놓고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와 자웅을 겨루던 다케다 신겐(武田信玄)이 급서한다. 신겐을 중심으로 형성된 반(反)노부나가 동맹의 견제로 천하통일 행보에 제동이 걸렸던 노부나가는 차례차례 반대 세력을 제압하면서 승기를 확고히 할 기회를 모색한다. 다케다의 군을 꺾는다면 천하통일의 8부 능선을 넘을 수 있다.
노부나가는 다케다군과의 결전에 대비해 두 가지의 비책을 궁리해 두었다. 첫째는 뎃포(鐵砲 : 조총)부대의 주(主)전력화이고, 둘째는 마방책(馬防柵)의 도입이었다.
전투 초기 중장기병이 적진을 돌파하여 기선을 제압하면 후방의 보병이 백병전으로 밀고 들어가는 것이 다케다 군의 전법이었다. 이에 따라 다케다 군은 기병이 위력을 발휘할 수 있는 평지를 전장으로 선호하였다. 노부나가는 이러한 적의 승리 공식을 역으로 이용하였다. 노부나가는 당시로서는 어마어마한 규모인 3,000정의 뎃포를 확보한 후, 사수병을 5개 부대로 편제하여 주력부대로 삼았다. 뎃포 사거리 내로 적 기병을 깊숙이 유인한 후 마방책으로 군마의 기동력을 무력화시키는 한편, 마방책 배후에 배치된 뎃포 사수들이 집중 사격을 가해 기병을 제압하는 전술이 고안되었다.
전투가 개시되자 다케다 군의 기마병이 바람같이 내달려 적진 앞에 도달하지만, 방책에 막혀 놀란 말들이 우왕좌왕하는 사이 방책 뒤에 늘어선 뎃포가 불을 뿜었다. 당대 최강 기마군단도 어찌할 바를 모르고 총탄 세례 속에서 속절없이 스러져 갔다. 불과 8시간의 전투 끝에 다케다 군은 궤멸적인 타격을 입고 패퇴한다.
나가시노 전투는 일본의 전쟁 양상을 일거에 바꿔 놓았다고 할 정도로 일본 내에서는 널리 알려진 전투였다. 뎃포의 등장으로 기존에 필승 전력으로 인식되던 기마병의 중요성과 유용성이 재정의되고, 전쟁의 승리 공식 자체가 뎃포를 중심으로 재구성되는 결과가 초래되었기 때문이다.
오다 노부나가는 당시 주전력인 기마병을 양성하기 위해서는 수년의 집중적 훈련과 기술 연마가 필요하였지만, 뎃포를 도입해 불과 몇 달의 훈련으로도 기마병을 제압할 수 있는 전력으로 활용하였다. 나아가 군비(軍費)의 면에서도 당시 뎃포가 매우 비싼 무기이기는 했지만, 군마를 사육·조련하여 전장에 동원하는 것에 비하면 비경제적이라고도 할 수 없었다. 노부나가는 사카이(堺)와 구니토모(國友) 등 뎃포 주생산지를 우선적으로 손에 넣고 자원을 투입하여 뎃포 대량생산에 나서는 한편, 일자리가 없어 빈둥거리는 젊은 청년들을 대거 모집하여 뎃포 사수로 양성하였다. 그 결과 불과 3개월 훈련받은 아시가루(足輕 : 말단 병사 계급)가 발사한 총탄에 10년을 전장에서 누빈 베테랑 기마 무장들이 추풍낙엽처럼 떨어지는 사태가 발생하였고, 핵심 전력의 개념 전환을 맞아 전쟁의 양상은 변할 수밖에 없었다. 이후 일본에서는 뎃포 없이 전쟁에 나가는 것은 무모한 짓이 되었다. ‘무뎃포(無鐵砲)’라는 말이 여기서 나왔다.
조선 기록에 의하면 탄금대 전투에서 살아 돌아온 사람은 단 4명이라고 한다. 일본 문헌에는 일본군 전사자가 150명으로 기록되어 있다. 그만큼 조선군의 완패였다.
조선이 저지른 진정한 실수는 두 가지다.
첫째, 준비 안 된 군대는 성공할 수 없다는 것이다. 우리는 오랫동안 조선이 놀고먹고 유비무환의 정신을 잊어버려 임진왜란에 대비하지 않았다고 알아 왔다. 아니다. 조선은 꽤 열심히 일본의 침공을 대비했다. 그러나 포인트가 전혀 잘못 맞춰져 있었다. 조선군의 전술 수준이 잘 훈련된 일본의 정규군이 아닌 왜구에 맞춰져 있었다는 게 문제였다. 조선군의 동원체제, 훈련, 전술 수준은 왜구 정도는 충분히 감당해낼 수 있었지만, 일본 정규군을 상대할 경우 사정이 달랐다. 그리고 일본의 동향과 변화를 무시했고, 그들의 군대를 파악하고 대비하려는 노력이 부족했던 것, 그것이 바로 조선이 저지른 진정한 실수였다. 「안전 인문학수업(이명우, 지식공감, 2021)」 중에서
당신의 댓포는 무엇인가?
산업현장에서 재해예방을 위해 전투 중인 우리에게 뎃포는 무엇인가? 우리의 뎃포는 산업안전보건기준에 관한 규칙(이하 '안전규칙'이라함) 이다. 안전규칙은 673조에 달하는 방대한 기준이다. 제1장 총칙에 작업장, 통로, 보호구, 관리감독자의 직무와 사용의 제한, 추락 또는 붕괴의 의한 위험방지, 환기장치 등은 물론이고, 기계안전, 건설안전, 전기안전, 화공안전, 산업보건, 특수형태근로자에 대한 안전보건조치까지 망라되어 있다. 뎃포 사수는 당연히 관리감독자들이다. 뎃포 사수인 관리감독자들에게 뎃포(안전규칙)를 잘 쏠 수 있게 교육하는 것이야말로 산업재해예방의 시작이다.
저자 소개 : 이명우
2013년 안전관리자를 위한 <안전관리자 인문학노트>를 집필했고, 최근 두 번째 책 <안전 인문학수업>을 출간했다. 그는 인문학에서 4차 산업혁명시대 안전관리의 해법을 찾고 있으며, 현재 대한산업안전협회에서 근무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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