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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55. 슬픈 중국 1부(인민민주독재 1948-1964), 송재윤, 까치

햇살처럼-이명우 2023. 9. 23. 16:50

655. 슬픈 중국 1부(인민민주독재 1948-1964), 송재윤, 까치

3부작 중 1부

  중국인민공화국은 노동자 계급이 영도하는, 노동자와 농민의 연맹에 기초한 인민민주독재의 사회주의 국가이다. <중국인민공화국 헌법> 총강(總綱) 1조

차례
프롤로그
제1장 슬픈 대륙의 역사를 돌아보라!
제2장 변방에 역사서를 주지말라!
제3장 1948년 창춘 홀로코스트 1 : 중화인민공화국 건국 비사
제4장 1948년 창춘 홀로코스트 2
제5장 해방, 인민을 삼켜버린
제6장 '인민 해방군'과 인해전술
제7장 토지 개혁 잔혹사
제8장 인민+민주=독재
제9장 마오의 도박, 미국과의 전쟁
제10장 목사가 된 공산당군
제11장 나는 황제로소이다.
제12장 반 외세 고립주의의 어리석음
제13장 빼앗긴 민국의 꿈
제14장 중국의 인텔리들은 왜 자유를 잃었나?
제15장 "마오쩌둥 신화" 비판
제16장 문자옥1:낙인찍고 재갈 물리고
제17장 문자옥2:그물치고 떡밥 뿌리고
제18장 백화제방, 우파사냥
제19장 빅 브라더의 정신세계
제20장 중앙서기처의 비밀
제21장 자유인의 망명
제22장 당신들의 민족주의
제23장 참새 대학살 촌극
제24장 붉은 투사냐, 전문가냐?
제25장 강물과 인간의 투쟁1
제26장 강물과 인간의 투쟁2
제27장 인류사 최대의 기근1
제28장 인류사 최대의 기근2 : 정치가 인민을 굶겨죽이다!
제29장 인류사 최대의 기근3 : 언론이 인민을 굶겨죽이다!
제30장 차르의 유토피아
제31장 체어맨의 외교술
제32장 책임지라, 빅브라더
제33장 영도자의 어줍잖은 변명
제34장 흑묘와 백묘의 변증법
제35장 인민민주 인격살해 : 국가주석의 최후

  어리석은 사람은 체험에 의존하고, 현명한 사람은 역사를 본다 - 유럽 속담 -

  주희의 충실한 제자였던 조선의 성리학자들은 중국의 역사서에 대해서는 거의 무관심했다.
  단적인 예로 조선 성리학의 거두 퇴계 이황(李滉,1502~1571)은 단 한 권의 역사서도 저술하지 않았다. 율곡 이이(李珥, 1537~1584)는 소중화(小中華)의 이념 아래 기자동래설(箕子東來說)이 강조된 <기자실기(箕子實記)>라는 단편의 기록을 남겼을 뿐이다. 퇴계와 율곡은 모두 후대의 역사서를 통해서 인간사의 궤적을 경험적으로 탐구하기 보다는, 유가경전에 제시된 고대 성왕(聖王)의 이념을 존숭했던 관념의 철인(哲人)들이었다. 관념의 철인들에게 과연 인간의 현실은 무엇일까?
  "역사서를 주지말라!" 고려 사신에게 이렇게 외쳤던 소동파.
  11세기 후반 송나라(960~1279)에 파견되었던 고려의 사신들은 수도 카이펑(開封)의 국자감에서 다양한 서적을 사 모았다. 당시 송나라 정부는 상서성의 조령(條令)으로 서적의 국외 반출을 엄격히 관리하고 있었다. 역대 제왕의 통치술이 일목요연하게 정리된 정부 공식 백과사정 <책부원귀(冊府元龜)>, 태학의 칙령과 세칙, 역대의 역사서 등은 고려 사신들에게는 금지된 서적이었다. 그런 상황에서도 고려의 사신들은 국자감의 관리들과 개인적인 친분을 터서 슬그머니 역사서를 사 모으려고 했다.
  "적벽부(赤壁賦)"로 우리에게도 잘 알려진 대문호 소동파(蘇東坡,1037~1101)는 이 사실을 알고 격분했다. 그는 모두 세 통의 상주문(上奏文)을 작성해서 고려 사신에게 절대로 중국의 역사서를 넘겨주어서는 안된다고 역설했다. 고려의 지식인들이 중국의 역사서를 읽게 되면 거란으로 중요한 정보가 유출될 수 있다는 것이 표면적인 이유였다. 과연 군사상 이유 때문에 역사서의 국외 반출을 금지했을까? 그 보다는 혹시 변방의 지식인들에게 중화제국의 어두운 역사를, 자신들의 알몸과 민낯을 보이기 싫었음은 아닐까?
  역사서와 달리 <書經>, <詩經>, <論語>, <孟子> 등 이른바 경서의 구매는 전혀 금지되지 않았다. 오히려 경서는 변방의 사신들에게 적극 권장되었다. 경서에는 먼 옛날 성스러운 임금들의 빛나는 위업과 아름다운 행적이 기록되어 있으며, 고원한 도덕원칙과 이상정치의 청사진이 담겨 있었다. 반면 역사서에는 권모, 술수, 모략, 중상, 배신, 찬탈의 어두운 기록이 담겨 있었다.
  소동파는 그런 적나라한 중화문명의 실체를 보일 수 없다고 생각했다. 변방의 지식인들에게는 오로지 도덕과 아름다운 이념 등 중화제국의 밝은 면만 보이려는 의도였다. 제국의 중심부에 있는 지식인의 간지(奸智)가 아닐 수 없다. 역사의 경험과 시행착오의 기록을 깊이 공부하면 인간의 슬기와 지략을 얻는다. 영악하고 노회해진다. 소동파는 변방의 지식인들이 고루과문(孤陋寡聞,견문이 넓지 못하고 생각이나 말이 고루하고 천박한 것)하고, 엄숙우직(嚴肅愚直)한 백면서생으로 남기를 원했으리라.
  한나라(기원전 206~기원후 220)이후 2,000년이 넘는 세월에 걸쳐서 중국의 지식인들은 황홀한 경(經)의 세계를 구축했다. 중국의 경학은 보편이념이 되어 동아시아를 지배했다. 전통시대의 동아시아의 지식인들은 제국의 변방에서 경의 이념에 빠져서 이상화된 "중국(中國)"을 보편질서로서의 "중화(中華)"세계를 흠모했다. "중화"를 숭배했던 변방의 지식인들은 많은 경우 중화제국의 역사적 현실에는 눈을 감았다.
  남송 성리학의 시조 주희(朱熹,1130-1200)는 어린 학생들에게는 "역사서를 읽히지 말라!"고 했다. 역사책 속에는 불안전한 인간의 악행이 빼곡히 기록되어 있다는 이유였다. 그는 역사를 읽기 전에 우선 성현의 모범을 본받아 실천하며 도덕적 의지를 계발하라고 했다.
  고려 사신에게 "역사서를 주지말라!"고 외쳤던 소동파의 의도대로 고려와 조선의 지식인들은 중국의 역사서에는 눈을 감았다. 그들은 중화문명의 경학에 함몰되어 냉철하게 중국의 역사를 살펴보지 않았다. 1,000년의 세월 동안 중화문명권에 속해있으면서도 한국의 문명에는 중국의 역사학 자체가 크게 자리잡지 못했다. 중국인의 행위를 통해서 중국의 현실을 탐구하기 보다는, 경전의 세계에 빠져서 이상화된 중화의 세계를 존숭했다. 지난 1,000년의 세월 동안 한반도의 지식인들은 역사의 현실은 외면한 채 경전의 이념만 좇고 따랐다.
  안타깝게도 오늘날의 많은 한국인들도 중국의 구체적 현실에는 눈을 감고 있는 듯하다. "관념철인"의 사상적, 문화적 영향 때문일까? 경에 빠져서 역사를 외면한 "변방 지식인들"의 뿌리 깊은 친중사대와 소중화 의식 때문일까? 그러나 중화 중심 질서(Sino-centric order)는 아편전쟁 이후 무너졌다. 한국은 이제 변방이 아니라 지구 전역에 촘촘한 네트워크를 구축한 세계적 국가이다. 중국과의 정상적인 관계를 정립하기 위해서는, 인류의 관점에서 중국의 실상을, 역사의 현실을 있는 그대로 직시해야 한다.  2022.4.28. 아침.

  전근대 왕조들은 지방의 엘리트 계층을 포섭해서 통치의 기반을 공고히 했지만, 중화인민공화국은 지주계급의 척결과 토지의 압류 및 재분배를 건국의 기본절차로 삼았다.  

  공산당군은 마오쩌둥의 영도 아래 장제스의 "반동정부"로부터 1.국가의 영도권을 지키고 2.인민의 생명과 재산을 보위하고 3.인민주권을 지키기 위해 성공적인 군사작전을 통해서 전국을 점령했다는 선언이다. 결국 중국공산당이 말하는 "'해방"이란 무엇보다 군사적 점령에 의한 토지, 인민 그리고 재원(財源)의 확보를 의미한다. 공산당의 선전에 따르면, 중화인민공화국의 성립은 크게 세 가지 의미에서의 해방이었다. 첫째, 제국주의 침탈로부터의 "조국해방", 둘째, 국민당 정부로부터의 "반 부르주아 반 독재 해방", 셋째, 수 천년 동안 지속된 경제적 착취로부터의 "인민해방"이었다.

  창춘 홀로코스트 1.
  1948.5.30. 창춘을 포위한 린뱌오는 포위작전으로 창춘을 "죽음의 도시"로 만드는 전술을 구사한다. 국민당군 10만명, 민간인 50만명도 함께 말려죽이는 홀로코스트였다. 5월부터 10월까지 5개월간 창춘은 20만명의 공산당군에게 포위되고, 공산당군은 도시 둘레를 삥둘러 95km의 철조망를 쳤다가 이내 65km로 좁혀간다. 도시를 둘러싼 두겹의 높은 철조망 주변으로 매 50미터마다 보초를 세워 놓았다. 밧줄이나 판자를 이용하여 철조망 넘기를 시도하거나 밀수를 기도하는 시민들에 대해서는 발포명령이 떨어졌다. 약 15만명의 인구가 피난민으로 떠돌다가 도시를 탈출했지만 철조망에 갇혀버린 시민들은 탈출을 시도하다가 실패한 채로 고통스럽게 스러져갔다. 최소 12만에서 33만 사이라고 추정한다.
  두 겹의 철조망를 사이에 두고 공산당군 병력과 국민당군 병력이 서로 대치한 상황이다. 도시를 둘러싼 그 두 개의 철조망 사이의 비좁은 공간은 시체만 쌓여가는 무인지대(無人地帶)이다. 중국어로 차쯔(卡子,누를 잡)라고 불렸다. 초소나 검문소를 의미하는 바로 그 차쯔이다. 생존의 한계 상황에서 차쯔에 몰려간 사람들은 철망에 갖힌 채 무참히 죽어간다. 시체 위에 시체가 쌓인다. 시체를 뜯어먹는 야생동물이 어슬렁거리고, 그 동물을 노리는 굶주린 인간이 몽둥이를 거머쥔다.
  창춘 포위전은 마오쩌둥의 승인 아래 이루어졌다. 마오쩌둥이 린뱌오에게 보낸 전문(1948.6.7.)
  '지상에서 적의 식량을 그 근원까지 반드시 다 끊어야 한다. 이 점만 확실히 하면, 완전한 승리이다'

  "인민해방군"에 갇혀버린 인민들
  1948년5월23일부터 시작된 창춘위곤전쟁(長春圍困戰爭)은 단 두 마디 원칙으로 정리된다.
  식량은 못 들어가고, 사람은 못 나온다.(糧不入, 人不出)        

  현대 중국어에 행존자(幸存者)라는 단어가 있다. 천운으로 죽임을 모면한 행운의 생존자라는 뜻이다. 린징우(1925~ ) 노인은 쉬저우 최전선 전투에서 허벅지에 총탄을 맞고 용케 살아남은 행존자다.
  린 노인에게는 그 모든 기억을 압도하는 악몽이 남아 있었다. 일렬로 쭉 늘어선 병사들이 힘껏 적진으로 수류탄을 내던지자 움푹 파인 땅덩이가 들끓는 기름 솥처럼 폭발했다. 참호 속에 있던 그는 다음 순간 겹겹으로 몰려와서 화염을 내뿜는 포구(砲口) 앞에 정면으로 몸을 던지는 수 많은 사람들을 총구를 통해서 보았다. 공산당군의 맨 앞에 서서 몰려오는 사람들은 무고한 민공들이었다. 그들은 힘없이 전쟁에 불려나온 민간인들이었다. 바로 오늘 날 중공정부가 전승의 최대 공로자라고 칭송하는 "지전(支前)"의 영웅이다.
  국민당군은 바로 그 불쌍한 민공들을 향해서 손에 힘이 빠지도록 기관총을 난사했다. 군인들도 가슴이 찢어질 듯이 아파서 눈을 꼭 감고 고개를 숙인 채 방아쇠를 당겼다. 총질을 멈추면 곧 죽을 판이어서 계속 사격을 할 수 밖에 없었다. 사격을 멈추면 그 자신이 곧 목숨을 잃기 때문이다. 린 노인의 증언이 사실이라면, 공산당군은 수 많은 민간인을 열세워 총알받이로 희생시킨 셈이다.

  국공내전이 한창일 때 중공지도부는 당시 중국 전역의 농촌에서 대략 10%의 농민이 지주 혹은 부농이라고 단정했다. 토지개혁은 바로 그 지주와 부농이 소유한 토지를 압류해서 중농과 빈농에게 재분배하는 과정이었다. 중공정부의 선전에 의하면 지주, 한간(漢奸, 친일 매국노), 국민당 부역자, 토호(土豪)등 소수의 적인을 제거하고 다수의 인민을 해방시킨 '위대한 혁명'이다.
  최신 연구에 따르면, 당시 토지개혁은 무려 300만~500만 명의 인명(대부분 중,소 지주)을 앗아간 대규모 학살극을 수반했다. 그런 과정을 겪었음에도 대다수 농민의 실생활은 개선되기는 커녕 악화되었을 뿐이다. 재산을 모으면 곧 지주나 부농으로 몰렸기 때문에 농민들에게는 정성을 들여서 농사를 지을 까닭이 없었다. 그 때문에 토지의 생산력은 전반적으로 저하되었다.

  "인민"과 "인민의 적"
  오늘 날 중국의 고등학교 정치교과서에 따르면, 인간(人間)이 다 인민(人民)이 아니다. 인간은 인민(人民)과 적인(敵人)으로 구분된다. 인민이란 역사의 정도(正道)를 걷는 다수 대중을 말한다. 반면 적인(敵人)이란 역사의 정도에서 이탈한 적대세력이다. 공산혁명의 성공을 위해서는 "절대다수 인민"이 "극소수의 적대세력"을 억압하고 제거해야만 한다. 인간사회의 암세포처럼 반드시 제거해야 하는 "적대세력"이 따로 있다는 발상이다.

  1950년 마오쩌둥은 "반혁명분자를 진압할 때에는 일관되고, 정확하고, 맹렬(잔인)해야" 한다는 온(穩), 준(准), 한(猂)의 3대 방침을 제정하는데, 그 중 한(猂), 세번째 원칙이 가장 강조되었다.

  이 모든 사건들은 "해방"과 "혁명"의 이름으로 자행된 씻을 수 없는 전체주의 국가범죄의 참상이다. 다수의 인민이 소수의 "인민의 적"에 가한 "인민독재"의 실상이다. 과연 인민민주독재를 민주주의라고 부를 수 있을까? 소수에 대한 다수의 독재란, 실은 다수지배(majoritarian rule)일 뿐이다. 플라톤(Platon, 기원전 427?~기원전 347?)이 <소크라테스의 변명>에서 항변하듯이, 고대 그리스의 소규모 도시국가에서도 민주정은 최악의 중우정치(mob rule)로 전락하고 말았다.
  다수결의 원칙만을 통해서 국가의 기본정책을 정하려고 하면 최악의 민주주의를 피할 수 없다. 인민의 일부가 다수를 점하면 곧바로 인민독재의 정당성이 확보된다. 이런 원칙에 따르면, 다수가 진정 원한다면 소수를 잡아서 고문하고, 격리하고, 도륙해도 죄가 될 리 없다. 소수는 인민의 자격을 상실한 "인민의 적"일 뿐, 적은 더는 인간이 아니다.
  북한의 헌법 역시 바로 이 논리를 그대로 차용하고 있다. 2022.5.11. 수
인민을 "사람"으로, 인민의 적을 "사람의 적"으로 쓰고 있을 뿐이다. 공산혁명에 저항하거나 김일성(金日成, 1912~1994) 주체사상을 부정하는 인간은 더는 "사람"이 아니라 "사람의 적"일 뿐이다. "사람이 모든 것의 주인이며 모든 것을 결정한다!"는 주체철학의 제1명제는 인간 일반에 대한 보편명제가 아니다. 사람은 "사람의 적"이 송두리째 제외된 특정 계급의 별칭일 뿐이다.
  그 일부가 다수의 지위를 선점하고 "사람"의 이름을 사칭하면, 곧 "사람 중심"의 인민독재가 정당화된다. 북한에서는 김일성 유일사상을 반대하면 "사람의 적"으로 간주되어 학살되고 만다. "사람"이라는 말의 뜻 자체가 근본적으로 변질되었기 때문이다. 사람은 더 이상 모든 사람을 지칭하는 보통명사가 아니라 특정계급 혹은 특정 세력을 칭하는 고유명사가 되어버린 셈이다. 김일성의 "사람 중심" 철학이 인류사 최악의 전체주의 세습 독재 왕정이 되어버린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20세기 역사에서 민주주의의 이름으로 자행된 폭력의 실상을 깊이 탐구한 마이클 만(Michael Mann) 교수는 <민주주의의 어둠(The Dark side of Demo Cracy),2004>라는 책에서 중요한 태제를 정립했다. 그에 따르면 인종청소는 한 사회 구성원의 특정계급 내지는 종족이 인민 혹은 국민의 이름을 참칭할 때 발생하는 범죄이다. 다수가 인민이 되는 순간, 소수는 인간의 자격을 박탈당하고 만다. "인간"의 자격을 박탈당한 "인간"은 너무도 쉽게 인종청소의 대상이 된다는 설명이다.
  전체로서의 "인민"이 강조되는 사회에서는 "개인"으로서의 인간이 억압당한다. 다수주의위 무지몽매한 폭력에서 "개인"을 보호하는 유일한 보루가 자유주의 헌법의 기본권 보장이다. 신체의 자유, 언론의 자유, 집회 및 결사의 자유, 거주와 이전의 자유, 양심의 자유, 사상의 자유등 연약한 개인은 바로 자유를 통해서만 집단의 광기와 폭력에 맞서서 스스로를 지킬 수 있다. 자유없는 민주주의는 최악의 전체주의 폭력으로 폭력에 맞서서 스스로를 지킬 수 있다. 자유없는 민주주의는 최악의 전체주의 폭력으로 귀결되도 만다. 현대 중국의 슬픈 역사가 일깨우는 준엄한 교훈이다.

  전쟁 쓰레기
  1950년 4월, 당시 중공 지도부에서는 이미 미국과의 한 판 결전이 초읽기에 들어가고 있었다. 미국 제7함대의 배치로 타이완 점령은 더욱 어려워졌다. 인도차이나의 혁명 또한 요원하기만 했다. 반면 한반도는 이미 불길에 휩싸여 있는데다가 김일성은 한반도를 잃고 만주지역으로 패주한 상황이었다. 그런 상황에서 공산당군이 개입했다는 사실은 그다지 놀랍지 않다.
  1949년 말 지상군 병력은 570만명에 달했다. 이제 막 출범한 중공 정부로서는 군비지출을 줄이고 군의 현대화를 도모하기 위해서 대규모 병력의 해산이 필요했다. 570만 지상군 병력에는 다수의 국민당 포로들과 투항부대가 뒤섞여 있었다. 중공정부 측에서 보면, 충성심을 의심할 수 밖에 없는 국민당의 잔존세력과도 같았다.1950년 봄 중공정부는 540만 군대를 400만으로 줄이는 과감한 병력감축을 시작한다. 병력감축으로 군비지출을 줄이고, 대신 타이완 정복에 필요한 공군력과 해군력을 보강하기 위함이었다. 한국전쟁의 발발은 중공정부에 지상군 병력을 재활용할 절호의 기회가 되었다. 1950년 가을 중공정부는 무려 200만 이상의 병력을 한반도에 투입했다고 한다. 2022.5.13.금요일

  재미 중국인 작가 하진의 <전쟁 쓰레기(War Trash),2005>

  일반적으로 헌법 전문에는 헌법 형성의 연혁과 국가의 이념적 기초가 서술된다. 미국 헌법처럼 역사가 오랜 헌법일수록 간략하고, 신생국가의 헌법일수록 긴 경향을 보인다. 자유주의 헌법일수록 높은 추상수준의 기초원리만을 기술한다. 반면 비자유주의 헌법일수록 이데올로기적, 종교적 내용이 다수 포함된다. 헌법 제정 및 연혁을 간명하게 적는 헌법이 있는가 하면 특정 역사 인식을 정통사관으로 강요하는 고압적인 헌법도 있다.
  정치학자 마이클 왈저(Michael Walzer)의 표현을 빌리면, 자유주의 헌법 전문은 얇고(thin), 비자유주의의 헌법 전문은 두껍다.(thick) 자유주의 헌법은 최대한 많은 구성원, 최대한 다양한 집단을 포용하기 때문에 전문이 얇아질 수 밖에 없다. 반면 비 자유주의 헌법은 특정 역사관, 종교관, 사상까지 강요하기 때문에 전문이 두꺼워질 수 밖에 없다. 얇은 헌법은 그 만큼 다양한 집단, 다양한 사상에 대하여 개방적이다. 구성원에게 더 많은 요구조건을 내거는 두터운 헌법은 역으로 한정적이고, 폐쇄적이다.
  자유주의 국가에서 정부는 결코 역사에 대한 유권해석을 내릴 수 없다. 국가가 물러선 공간에 자유로운 사상의 시장이 형성된다. 시민들은 그 사상의 시장에서 자유롭게 정치적 의사를 표현하고 경쟁한다. 새로운 사료가 발굴되고 산 증인의 증언에 쌓여갈수록 역사해석은 극적으로 뒤바뀌고 달라진다. 다양한 역사해석이 길항하는 사상의 시장에서 국가의 역할은 반칙행위만 적발하고 처벌하는 데 머물러야 한다.  
  예를들어 미국의 경우, "독립선언서"에 나오는 "만민평등"의 이념은 남북전쟁에서 북부가 승리함으로써 "재건 수정헌법 제13, 14, 15조"를 통해서 비로소 실현되었지만, 미국의 헌법에는 남북전쟁이라는 구체적인 사건 자체가 거론되지 않는다. "재건 수정헌법 제13, 14, 15조"는 남북전쟁의 결과이지만, 남북전쟁에 관해서 국가가 구체적인 역사해석을 내릴 권리가 없다. 국가가 개인에게 특정 종교를 믿으라고 강요할 수가 없는 것과 마찬가지다. 병균을 제거하듯 특정 역사해석을 "소독하고(sanitize)", 특정 역사해석을 국가의 공식적인 입장으로 채택하여 모든 구성원에게 강요하는 헌법은 자유주의 기본원칙에 반한다. 요컨대 자유주의 사회에서 역사에 대한 국가의 유권해석이란 있을 수 없다. 2022.5.17.아침
  부득이 헌법 전문에 역사 서술을 넣으려면, 헌법 형성의 연혁에 관한 객관적 서술에 그쳐야 한다. 건국 이후에 전개되는 복잡한 역사적 사건에 관한 국가의 공식 입장을 헌법 전문에 독점적으로 넣으려는 발상은 전체주의적인 월권이다. 건국에 버금가는 체제전환 사태를 겪은 국가의 헌법에서는 전형적으로 과거사 반성이 나타나지만(남아프리카 공화국, 일본, 독일, 동유럽권) 그 경우에도 특정 사건을 거론하지는 않는다.
  민국의 꿈을 저버리는 중국의 현재 상황을 관망하면서 최근 "개헌"을 둘러싸고 이념전쟁에 휩싸인 대한민국에 꼭 전하고 싶은 말이 있다. 앞으로 채택될 개정 헌법의 전문을 200자 원고지 반 장 분략으로 축약하는 안은 어떤가?

  펜은 과연 칼보다 강한가? 물론 그렇다. 권력은 예나 지금이나 언어에서 나온다. 주먹으로 상대방을 제압해도 말싸움에서 지면 그는 기껏 깡패가 되고 만다. 무력 앞에서 인간은 끝끝내 승복하지 않지만, 아름다운 논리를 만나면 영혼을 빼앗기고 만다. 인간은 명분의 동물이며, 혁명은 도덕적 정당성을 요구한다. 때문에 혁명가는 무엇보다 훌륭한 문필가여야 한다. 멋진 말에 속아서 목숨을 던지는 어리석음이야말로 그토록 영리하다는 호모사피엔스의 사피엔스 고유의 특징이기 때문이다.

  명분과 논리를 빼앗긴 지도자는 신뢰를 잃고, 신뢰를 잃은 자는 결국 권력을 빼앗기고 만다. 그 점을 간파했던 마오쩌둥은 일찍부터 언어의 매력에 매혹되었고, 부단히 작문을 연습해서 수사(修辭)의 달인이 되었다. 그는 명분과 논리가 중요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링에 오르는 복서처럼 그는 강렬하고도 예리한 문장으로 말의 전쟁에서 승리해서 권력의 기반을 닦았다.

  1957년 4월말부터 6월초까지 중국 전역에서 "백화제방 운동"이 들불처럼 일어났다. 백화제방(百花齊放)이란 수많은 종류의 꽃들이 모두 활짝 피어난 상태를 의미한다. 수 많은 사상가들이 경쟁하던 춘추전국시대(기원전 8세기~기원전 3세기)의 백가쟁명(百家爭鳴)과 짝을 이루는 성어이다. 1956년 소련의 흐루시초프가 스탈린 격하운동을 전개한다. 이어서 폴란드와 헝가리에 대규모 시위가 발생하고, 소련군 탱크를 몰고 진압한다. 그런 국제 정세를 묵묵히 지켜보건 마오쩌둥은 중국의 지식인들과 비당원, 관료집단을 향해서 정부의 오류와 당내의 모순을 마음껏 비판하라고 요구한다. 그는 사상문화곙에서의"백화제방"과 과학계에서의 "백가쟁명"을 부르짖는다. 덕분에 느닷없이 공산당 일당독제의 전체주의 국가에서 사상의 자유와 사상의 다양성이 만개하는 듯 했는데......
  백화제방의 단꿈은 그러나 열흘도 못되어 시들고마는 검붉은 꽃잎들처럼 처참하게 부서졌다. 비판적 지식인들은 불과 5주일만에 정부의 거센 반격에 무너지고 말았다. 그 짧은 자유의 시간 동안 불만을 토로하고 정부를 비판했던 사람들은 곧이어 전개된 "반우파 투쟁"에서 덩샤오핑이 이끄는 중앙 서기처의 음흉한 기획에 따라서 긴급 체포되었다. 전국적으로 최소 50만명의 비판적 지식인들이 수갑을 차고 포승줄에 묶인채로 영어(囹圄)의 신세로 전락했다.  "괜찮다. 무엇이든 하고 싶은 말을 하라." 며 독촉하던 그 정부가 "하고 싶은 말을 한" 지식인들을 모두 잡아 넣다니?
  너무나 표리부동하여 믿지 못할만큼 황당무계 하지만, 돌이켜보면 1940년대 정풍운동 때부터 중국공산당은 똑같은 방식으로 지식분자를 숙청해 왔다. 당의 발전을 위해서 비판을 요구하고는 그 비판을 근거로 가혹한 숙청의 칼날을 휘두르는 치졸하고도 비겁한 폭력이다!
  바로 그런 국가폭력을 합리화 하기 위하여 마오쩌둥은 "양모(陽謀)"라는 신조어를 사용했다. 음모(陰謀)가 나쁜 목적으로 몰래 꾸민 흉악한 계략이라면, 양모란 좋은 목적으로 공공연히 꾸민 공공선의 책략이란 의미다. 바로 그 양모의 결과 1957년 이후 중국 인민들은 생각하기를 멈추었다. 말하기를 포기했다. 대신 바짝 엎드려 숨죽이고 살아남는 침묵의 처세술을 익히거나, 바람의 방향을 미리 감지하여 재빨리 온몸을 던지는 눈물겨운 독심술을 터득했다. 더는 누구도 정부의 시책에 반대하거나 당의 지도부를 비판할 수 없었다. 그 결과 중국 사회는 지적 암흑기를 거쳐야만 했다. 비판세력의 침묵과 순응세쳑의 가식은 대약진 운동의 광기를 낳았다. 그 광기 속에서 최대 4,500만명의 아사자가 속출했다. 마오쩌둥의 양모(陽謀)는 인민을 굶겨죽인 식인(食人)의 음모일 뿐이었다.

  '중화민족'이란
  정치학적으로 민족이란 종족의식, 인종의식, 역사의식, 문화전통, 생활습관 등을 공유한다고 여기는 사람들의 공동체(Community) 혹은 집합체(Collectivity)를 말한다. 중화민족은 이런 일반적인 의미의 민족과는 다르다. 중화민족이란, 한족 뿐만 아니라 중국 영토에서 살고 있는 모든 민족을 아우르는 포용적 개념이다. 장족(1,700만), 회족(1,500만), 만주족(1,000만), 위구르족(1,000만), 묘족(약900만) 등이 모두 중화민족의 일부로 인식된다. 인종, 지역, 신념을 불문하고 미합중국에 살고 있는 모든 시민을 통틀어 '아메리칸 민족'이라고 부르는 것과 다르지 않다.
  다양한 소수민족이 공존하는 다민족국가를 지향하면서 동시에 중국을 중화민족의 국가라고 정의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 연원을 추적해보면, 한국어에는 없는 국족(國族)이라는 개념을 발견하게 된다. 민족도, 종족도, 국조기 바로 중화민족의 의미를 이해하는 핵심어이다.
  국족은 무술변협의 유신파(維新派) 량치차오(梁啓超, 1873-1929)가 1920년대에 고안한 개념이었다. 량치차오는 인종, 문화, 언어, 습속을 불문하고 중국 영토에 살고있는 모든 사람은 중화민족이라는 국족에 포함된다고 주장했다. "민족"의 어의가 전체 국민으로 확장된 셈인데, 량치차오는 무엇보다 주관적인 민족의식이 국족의 가장 중요한 요소라고 생각했다.

  "이제 민족을 넘어서 인류를 보라! 일국(一國)을 넘어서 세계를 보라. 국사(國史)를 넘어서 세계사를 보라!"

  마우쩌둥은 쥐, 파리, 모기, 참새도 없는 "사무지방(四無之邦)"의 건설을 꿈꾸었다. 1955년 부터 시작된 참새 대학살은 마오쩌둥의 "몽상"이 빚어낸 참상이었다.(58년까지 지속) 22.5.24. 아침에

  문화혁명 당시 홍위병 집회에서 일어난 비투(批鬪). 비투란 적인에 대한 비판과 투쟁이라는 의미다. 말이 좋아서 비투이지, 실상은 광기의 집단폭행일 뿐이었다. 비투집회에서 홍위병들은 "반혁명분자들"을 무릎꿇리고, 욕설을 퍼붓고, 자백을 강요하다가, 감정이 격앙되면, 머리털을 뜯고, 뺨을 때리고, 침을 뱉고, 주먹질하고, 발길질하고, 모둥이질까지 해댔다. 비투가 절정에 오르면 그 광경을 지켜보던 수천, 수만명의 군중들이 가슴이 터지도록 혁명의 구호를 외치며 형장에 넘어진 죄인을 향해 증오를 쏟아냈다. 그런 무지몽매한 집단 폭행을 견디지 못해 현장에서 목숨을 잃거나, 충격을 견디지 못하고 이후에 목숨을 끊는 희생자도 많았다.

  어떤 상황에서건, 좋은 결과를 불러오면 좋은 정책이다. 나쁜 결과를 초래하면 나쁜 정책이다. 지도자의 치밀한 계산도, 신중한 점검도 없이 섣부른 정책을 강행하면 피해는 고스란히 인민의 몫으로 돌아온다. 성직자라면 오로지 신념에 따라서, 양심의 명령에 따라서 행동해야겠지만, 권력자는 정책의 결과에 책임을 져야하고, 오직 정책의 결과로만 평가받아야 한다. 현대 국가의 정치인은 철인왕도, 도덕군자도, 윤리교사도, 종교적 구루(Guru)가 될 필요가 없다. 오로지 최대다수의 최대행복을 위해서 정책을 설계하고 실행하는 전문적인 행정가여야 한다. 바로 그런 이유 때문에 인민은 지도자에게 권력을 위힘한다. 권력은 개인의 영달이 아니라 공익의 수단이다. 권력자는 성직자처럼 정치적 동기를 말하기 보다는 스스로 추진한 정책의 결과에 무한한 책임을 져야 한다고 막스 베버(사회학자, 1864-1920)는 주장한다.

  1962년 여름 덩샤오핑은 "누런 고양이든 검은 고양이든 쥐만 잘 잡으면 된다!" 라는 쓰촨성의 속담에 빗대어 실용주의 개혁노선을 옹호했다.

  모두가 공모해서 류사오치를 죽인 것이다. 구태여 범인의 이름을 부르자면, '인민 민주주의'이다. 다수가 "인민"의 이름을 선점하면, 무소불위의 권력이 생겨난다. 인민 앞에서는 헌법도, 법률도, 양심도, 도덕도 무력해진다. 오늘날 한국의 일부 정치인, 언론인, 정치학자들이 감상적으로 칭송하는 "직접 민주주의"도 실은 중국식 "인민 민주주의"와 크게 다르지 않다. 법의 지배를 벗어난 민주주의는 다수지배(Majoritarianrule)이며 군중지배(Mob rule)일 뿐이다. 아리스토텔레스의 통찰대로 민주주의가 타락하면 무정부 상태가 된다. 류사오치의 인격은 "인민 민주주의"에 의해서 살해되었다.

2022.5.26.밤. 저녁을 먹고 5km 조깅 후 들어와 씻고 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