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송대학의 정준영의 북 카페에 출연하여 한 이야기입니다.
1. 레오나르도 다 빈치가 과학자였는가 하는 시각에 대해서?
<모나리자>의 미소에 대한 수수께끼만큼이나 레오나르도가 수수께끼의 인물로 알려졌기 때문에 그 진상을 밝히려는 데 있다고 봅니다. <최후의 만찬>은 구설수에 오른 작품으로 그 작품의 이면에는 숨겨둔 진실이 있다는 식으로 많은 사람들이 가설을 내놓았습니다. 레오나르도는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니므로 많은 가설들은 가설들로만 존재할 뿐 레오나르도를 설명하는 데 별로 도움이 안 되고 그가 천재였다는 점만을 부각시킬 뿐입니다. 그리고 과학자로서 그가 발명한 것들이 너무 방대하고 엄청나서 혹시 가짜일 수도 있다는 의심에서 그 내용을 증명해 보이는 과정에서 그의 참모습이 밝혀진 것이라고 봅니다. 결과는 과연 그는 위대한 과학자였구나 하는 것입니다.
2. 레오나르도 다 빈치와 동시대 인물과 비교하면?
레오나르도를 이해하기 위한 동시대 인물로는 미켈란젤로로 족하다고 생각합니다. 왜냐면 레오나르도만큼 큰 인물을 그에 버금가는 큰 인물과 비교해야지 그보다 못한 많은 사람들을 언급해야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레오나르도와 미켈란젤로는 르네상스의 두 거봉입니다. 이 산에서 보면 저 산이 커 보이고 저 산에서 보면 이 산이 커 보이지만, 과학을 제외한 미술에서 보면 비교의 대상이 아니라 높이가 같은 두 산입니다. 다만 미켈란젤로가 더 많은 작품을 남긴 것은 그가 당대에 인기 있는 작가였던 반면 레오나르도는 그렇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오늘날에 와서 돌이켜보면 레오나르도가 미술가로서 인기를 끌지 못한 것이 그로 하여금 방향을 돌려 과학에 매진하는 계기가 되었으므로 오늘 방송대학에서도 그를 과학자로 조명하게 된 것이라고 봅니다.
레오나르도는 멋진 옷을 입고 오늘날의 고급 스포츠카에 해당하는 값비싼 말을 타고 다녔습니다. 손수 악기를 만들고 작곡과 연주를 하면서 풍류를 즐겼습니다. 그는 인생을 즐겁게 살기를 바랐으며 물질이 주는 풍요로움을 즐겼는데, 이는 과학자의 태도에 합당하다고 봅니다. 반면 미켈란젤로는 중세의 어두운 도덕관에 젖어 있었고, 명성이 레오나르도와는 비교가 안 되게 높아 많은 돈을 벌었지만 물질이 주는 풍요로움에 빠지는 것을 죄라고 여겨 검소한 생활을 했습니다. 레오나르도는 상류사회에 접근하여 화려한 삶을 살았던 던 데 반해 미켈란젤로는 현세의 안락보다는 내세의 영생을 소망했기 때문에 일찍이 자신이 속했던 상류사회를 벗어났습니다. 여기에는 그의 기독교관이 크게 작용했는데, 그는 거의 아흔 해를 사는 장수의 복을 누렸지만 인생이 길어지는 것을 오히려 죄를 더 많이 짓게 되는 요인으로 보고 스스로 염세주의의 짐을 졌습니다. 미켈란젤로의 삶은 금욕주의를 추구하는 구도자의 삶과도 같았습니다.
두 사람을 한 마디로 표현한다면 레오나르도는 미래지향적인 사람이었고, 미켈란젤로는 변혁을 두려워한 과거에 속한 사람이었습니다. 레오나르도의 언행에는 경박함이 있었지만 유쾌한 사람이었고 절망적인 현실에서 비관적인 태도를 취하기보다는 적극적으로 행동하면서 보다 나은 삶을 개척해나갔습니다. 또한 레오나르도는 실용주의를 바탕으로 삶의 질적 향상을 위해 발명가로서 분주한 생을 살았습니다. 그는 인체를 기계에 비유해 사용하지 않을 경우 녹이 슨다고 생각했으므로 늙어서도 끊임없이 드로잉하고 자신의 생각을 많은 글로 남겼습니다.
반면 미켈란젤로는 과거 철학자와 신학자의 사상에 심취해서 언행에 신중을 기했으며 많은 작업을 피하고 자신이 맡은 작업에는 완벽을 기하기 위해 전력을 다했습니다. 그는 고상한 생각을 정해놓고 작업했으므로 늘 작품에 불만이 많았습니다. 따라서 근심이 많고 우울했으며 자책하며 스스로를 괴롭혔습니다. 지나치게 형이상학을 신뢰한 그가 나중에 신비주의에 빠지고 만 것은 어쩌면 당연해보입니다.
레오나르도는 사람들과 어울리기를 좋아하며 열린 삶을 살았기 때문에 그의 삶은 구체적으로 알려진 데 반해 미켈란젤로는 닫힌 생활을 했기 때문에 구체적인 생활상은 알려져 있지 않아 후세 사람들에게 궁금증으로 남아 있습니다. 미켈란젤로가 많은 편지와 시를 남겼어도 그것들이 철학적인 내용이라서 그의 정신세계를 아는 데는 훌륭한 자료가 되지만 그의 개인적인 삶을 아는 데는 도움이 되지 못합니다.
레오나르도가 미켈란젤로보다 나이가 23살이나 많다보니 레오나르도가 왕성하게 활동할 때 미켈란젤로는 아직 미술계에 발을 내딛지 않았을 때였습니다. 피렌체에서 인정받지 못한 레오나르도는 밀라노에서 주로 활약했으며 피렌체에 돌아와 잠시 머문 적은 있지만 말년을 프랑스에서 보내고 그곳에 뼈를 묻었습니다. 미켈란젤로는 피렌체와 로마에서 주로 활약했으므로 두 사람의 삶이 시간적으로나 공간적으로 겹치는 때가 별로 없어 두 사람을 한 환경 안에 놓고 비교하기는 어렵습니다.
높이를 가늠할 수 없는 두 사람이 공존하여 유럽 전역에 두 개의 산자락으로 미술의 지형을 바꾸어놓은 것은 참으로 다행한 일입니다. 독보적인 존재로 한 사람만 존재하는 것보다는 두 거인이 함께 존재한 것은 역사에 유익합니다. 두 사람은 서양미술의 패러다임이 되어 500년을 존속했습니다. 과거에 대한 지식과 지혜를 경외하는 미켈란젤로의 진지함이 레오나르도의 부족한 점을 채워주고, 과학에 근거해서 보다 나은 세계를 건설하려 한 레오나르도의 행위가 미켈란젤로의 부족한 점을 채워줍니다. 근대가 요구한 것은 둘 모두였습니다. 두 사람은 오늘날 우리에게도 물질문명의 발전만이 생을 풍요롭게 하는 것이 아니라 내면을 성찰하고 부덕한 행동을 금하는 데서 인간다운 삶을 살 수 있다는 교훈을 줍니다.
오늘날의 미술에도 이런 보완이 필요합니다. 지나치게 기술에 의존하는 유물론적 경향에는 깊은 성찰을 요구하는 사변적인 점이 결여되어 있고, 반면 지나치게 개념적이고 관념적인 경향에는 물질의 가치를 등한시하는 점이 있습니다. 따라서 르네상스 패러다임은 이제 와서 과거의 것이 아니라 오늘날의 패러다임을 보완해주는 기능을 여전히 갖고 있습니다. 레오나르도와 미켈란젤로의 활약을 통해서 르네상스의 교훈을 얻는 것은 매우 귀중한 일입니다.
3.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동방박사의 경배>에 대해서 그리고 그가 공학자가 되 계기에 대해 말씀해주십시오.
레오나르도가 빈치의 작은 마을에서 번화한 도시 피렌체로 간 것은 18살 경이었습니다. 그때까지 그가 받은 교육은 읽고 쓰기, 문법과 셈본이었을 것입니다. 이런 교육은 동네 성당의 신부가 아이들에게 가르치는 내용입니다. 철자가 불규칙해 읽기에 서툴렀음을 알 수 있고 따라서 고전을 읽지 못했음이 분명합니다. 그는 마흔이 넘어서야 라틴어를 배웠습니다. 레오나르도는 도나텔로의 제자였던 안드레아 델 베로키오의 작업장에서 도제생활을 시작했는데 큰 작업장을 갖고 있던 베로키오는 회화, 조각 외에도 싼 것 비싼 것 가리지 않고 모든 장식품의 주문을 받았습니다. 레오나르도가 베로키오의 작업장에서 배우고 조수로 활동한 기간은 12년이나 됩니다. 베로키오의 작업장에서 수학한 미술가들 가운데 유명한 사람이 많은데 페루지노, 기를란다요, 보티첼리도 포함됩니다. 레오나르도는 서른 살에 도제생활을 마치고 마스터로서 자신의 사업을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일감이 없어 여전히 베로키오의 조수로 그를 도왔습니다.
레오나르도는 아버지를 통해 수도회의 주문을 받아 제단화 <동방박사의 경배>를 그렸는데, 거의 2.5m의 정사각형 크기로 수십 명이 등장하는 스케일이 큰 그림이었다. 화가들이 성모 마리아를 그릴 때 다리를 벌린 자세로 옥좌에 앉은 모습으로 그리는 것이 보통이었는데, 그는 두 무릎을 모은 채 섬세하고도 여성적인 자세로 표현했으며 이는 후대 화가들의 본보기가 되었습니다. 그는 이 제단화를 2-3년 사이에 그려주고 돈 대신에 땅을 받기로 했지만 미완성으로 남겼습니다. 전통 도상을 따르지 않은 미완성의 이 그림의 특이한 점은 성모와 아기 예수를 중심으로 주변의 공간이 제대로 구분되지 않기 때문에 시간과 장소에 구애를 받지 않은 장면으로 보이며, 불필요한 상황의 세밀한 묘사를 생략했고 세 가지 예물 중 유황과 몰약을 바치는 것으로 제한했습니다. 이것 외에 성서가 언급한 내용에 관한 상징물이 이 작품에는 없습니다. 교회를 장식하는 종교화는 평신도들로 하여금 성서의 내용을 알게 하기 위한 것인데 그런 의미에서 레오나르도가 그런 목적으로 그리지 않았음을 알 수 있습니다. 성서에 대한 그의 해석은 교회의 입장과 사뭇 달랐습니다. 화면 상단에 말 탄 사람들이 서로 살상하며 전투를 벌이고 있어 고대세계의 혼돈을 은유적으로 표현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 그림을 보고 기를란다요와 보티첼리가 감동을 받았고 특히 라파엘로가 영감을 받아 이런 요소를 프레스코화를 그릴 때 응용했습니다. 레오나르도가 <동방박사의 경배>를 거의 완성단계에까지 그렸음에도 불구하고 완성하지 않은 것은 놀라운 일입니다. 이에 대해 바사리는 그가 “변덕스럽고 불안정했기” 때문이라고 했는데, 신학적으로 문제가 너무 난해하여 자신이 없었던 것으로 추정됩니다.
레오나르도가 공학자 또는 우리가 아는 과학자의 길로 방향을 바꾸게 된 것은 서른한 살 때에 밀라노로 가면서 부터였습니다. 피렌체에서 화가로 성공할 수 없다고 판단했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만약을 가정해본다면, 그가 피렌체에서 회화에 대한 일감을 많이 받았더라면 오늘날 우리가 아는 과학자로서의 그는 존재하지 않을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당시 밀라노는 터키족과 베네치아 공화국의 침략을 받고 있었으므로 자신이 무기를 개발하면 많은 돈을 벌 수 있다고 판단했습니다. 군수사업은 오랫동안 밀라노의 주력 산업이었으므로 그가 밀라노에서 자신의 입지를 구축하려고 한 것은 당연해보입니다. 밀라노 거리에는 수십 개의 무기판매점이 있었으나 이웃나라들과 터키에 비하면 무기사업은 열등한 편이었습니다.
밀라노로 갈 때 레오나르도는 최고 권력자에게 줄 편지를 소지했는데, 12개의 항목으로 된 편지에는
1. 공격뿐 아니라 화력에도 방어가 되는 운반 가능한 다리.
2. 적에게 포위되었을 때 물을 말리는 방법, 다리 외에도 도로포장, 사다리 올리기 등 다양한 기계.
3. 제방이 높고 장소나 지역이 험준해 기존의 방법으로 폭격이 가능하지 않을 때 폭격하는 새로운 방법.
4. 돌들이 비처럼 쏟아지는 박격포.
5. 전투가 바다에서 벌어질 경우에 대비해서 강한 대포, 발연, 화약을 물리칠 수 있는 배.
6. 소리를 내지 않고 통로와 비밀 지하터널을 파고, 강 밑으로도 터널을 파는 방법.
7. 약점이 없는 덮개가 있는 수송수단.
8. 대규모의 사석포, 박격포, 불덩이를 투사하는 기구.
9. 사석포에 문제가 발생할 경우 대형 투석기 외에도 공격, 방어용의 다양한 기구.
10. 평화로운 시기에 물을 이동하는 방법.
11. 대리석, 청동, 테라코타를 이용하여 어떤 인물이라도 조각으로 제작할 수 있다.
12. 군주의 부친을 기념하여 말탄 모습을 대규모의 청동 말로 제작할 수 있다.
그의 편지가 군주에게 전달되었는지는 알 수 없으나 과학에 근거하여 각종 무기와 공격과 방어를 겸하는 기구들을 무수히 제작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나타냈습니다. 그는 군부의 공학자처럼 이런 연구에 몰두했습니다.
결국 레오나르도는 동갑내기로 밀라노 군주 루도비코 스포르차를 13년 혹은 14년 섬기게 됩니다. 레오나르도가 루도비코와 가까워진 것은 그가 가장 사랑한 여인 세실리아 갈레라니의 초상을 그린 뒤부터였습니다.
4.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학문적 관심에 관해 말씀해주십시오.
레오나르도에게는 유머가 있었습니다. 어떤 사람이 왜 아이들이 못생겼는데 네 그림에서는 아름답게 묘사되었느냐고 묻자 “그림은 낮에 그렸지만 아이들은 밤에 만들어졌기 때문이라고 답했습니다. 이는 그가 사고에 있어 매우 융통성이 있었음을 말해줍니다.
그는 기타와 비슷한 14-17세기의 현악기 류트lute를 배웠는데, 파티를 좋아하고 시간을 즐겁게 보내기 위해서였습니다. 바사리에 의하면 레오나르도가 류트와 비슷한 악기를 은으로 제작했는데, 말 머리의 형상이었고 강력한 하모니와 완전한 음을 냈습니다. 발명가 외에도 음악에 재능을 나타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는 자신이 발명한 류트를 노래 반주로 사용했습니다. 그의 악기는 후세 화가들에 의해서 천사가 사용하는 악기로 그림에 등장합니다. 그는 그 밖에도 아쿠스틱 악기들을 발명했으며, 비올라, 녹음기, 북과 키보드가 있는 종을 발명했고, 바이올린도 발명할 생각을 갖고 있었습니다. 그는 악보를 읽고 쓸 줄 알았으며 악보를 ”보이지 않는 것들을 재현“하는 것이라고 적절하게 설명했습니다. 그가 쓴 악보는 현존하지 않지만 즉흥적 작곡가였다고 합니다.
레오나르도는 최초로 옵스쿠라를 이용하여 드로잉한 것으로도 알려졌습니다. 옵스쿠라는 어두운 방이나 상자의 벽에 작은 구멍을 내 빛을 통해 바깥 이미지를 벽에 거구로 투시되도록 하는 것을 말합니다. 레오나르도가 이런 장치를 발명하여 드로잉에 이용했는데 이는 카메라의 원리로 훗날 카메라의 발명을 가능하게 했습니다.
레오나르도가 과학을 배우기 시작한 것은 베로키오의 문하에 있을 때부터였습니다. 당시에 도제들에게 손으로 하는 일과 병행해서 기하학, 원근법, 해부학의 초보적인 지식이 교수되었습니다. 레오나르도는 “과학이 명장이고 군인을 훈련시킨다”고 보았고 “훈련에만 집착하고 과학이 없으면 조종 장치나 나침반 없이 항해하는 선원과도 같아서 자기가 어디로 가는지 결코 알지 못하게 된다”고 말했습니다.
레오나르도는 회화를 정밀한 자연과학으로 보고 또한 모든 학문 위에 군림한다고 생각했는데 그 이유는 학문은 비인격적인 데 반해 회화는 개인 및 개인의 타고난 재능과 직결되어 있다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화가에게는 수학적 지식뿐 아니라 시인의 천재성에 필적할 만한 재능까지도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는 그리스 시인 시모니데스의 말로 전해온 “회화는 말없는 시이고 시는 말하는 회화”라는 격언을 인용하면서 예술 사이의 서열에 관한 문제를 제기했습니다. 그는 말을 할 수 없는 것이 회화의 결점이라면 시 역시 보지 못한다는 점에서 결점이 있지 않느냐고 반문했습니다.
그의 노트북을 보면 관심사가 무엇이었는지 알 수 있는데, 여러 사람의 이름이 적혀 있는 가운데 의사이면서 철학자, 지리학자, 수학자인 파올로 델 포조 토스카넬 리가 적혀 있고, 피렌체에서 산수를 가르치는 베네데토의 이름도 있어 그가 그들의 강의를 들었는지는 알 수 없으나 관심이 다양했고, 과학에 특히 관심이 많았음을 알 수 있습니다.
레오나르도는 밀라노를 강둑을 따라 정돈된 이상적인 도시로 구상했는데, 노트북에 의하면 도시를 5천 채의 집이 있는 마을 다섯 개로 구획하고 각 마을에 30만 명이 거주할 수 있도록 도시를 계획했습니다. 그는 수로에 의한 십자형의 도시로 구상하면서 수로가 운하 역할을 하고, 정원에 물을 대며, 풍차칸과 수문으로 거리의 먼지를 닦아내게 했습니다. 건물의 외관을 높이고 거리의 폭을 넓게 해서 가능한 한 많은 빛이 건물 안으로 들어올 수 있게 했으며 굴뚝을 지붕보다 높게 만들어서 연기가 위로 흩어지게 했습니다. 그리고 도로를 따라서 하수도를 만들어 사용한 물이 주거지역에서 흘러나가게 했습니다. 노트북에는 건물 내부에 화장실이 넉넉해야 하고, 걸터앉는 시트를 현대화하여 회전문처럼 360도 회전해야 하며, 천장에 많은 구멍을 내 환기가 잘 되게 해야 한다고 적혀 있습니다.
5. 레오나르도 다 빈치가 인체를 해부했다더군요.
레오나르도가 해부학적 드로잉을 처음 그린 것이 1490년경 그가 38살 때였습니다. 그동안 쉬지 않고 건축에 관한 책을 읽고 나름대로 공부해온 그는 건축물을 유기체에 비유하여 잘못된 부분을 병들었다고 했는데, 이는 그만의 표현이 아니라 비트루비우스가 건축물을 의인화한 이래 일부 건축가들이 건축물 기둥을 사람의 갈비뼈, 좌우익부를 팔에, 앱스(건물의 끝)를 머리에 비유했습니다. 그가 건축에 관심을 기울인 시기에 해부학적 드로잉을 그리기 시작한 것이 흥미롭습니다. 물론 일찍이 해부학에 관심을 기울여 그가 남긴 드로잉들을 보면 남자누드를 그린 데서 인체의 모든 부분을 관찰했음을 알 수 있고 남자와 여자의 생식기 구조를 상세하게 묘사했음을 봅니다. 그러나 해부학적 드로잉이 38살 때에 그려진 것으로 봐서 건축물에 대한 연구가 인체에 대해 더욱 더 관심을 기울이게 한 것으로 추정됩니다. 그는 “인간이 세계의 모델이다”라고 했습니다. 그는 인체의 기하를 우주의 일체와 완전함에 적용했습니다. 레오나르도는 점차 대지 자체가 인간의 이미지를 닮았다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6. 레오나르도 다 빈치를 진정한 의미에서 과학자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과학science이란 말이 무엇을 의미합니까? 철학, 종교, 예술과 대립되는 개념으로 사용되는 과학은 어떤 가정 하에서 일정한 인식목적과 합리적인 방법에 의해 지식을 체계화하는 것 아닙니까? 지식이란 knowledge로서 knowing하는 것을 축적하는 것입니다. 가정이란 호기심이 있어야 할 수 있는 것입니다. 레오나르도에게는 호기심이 있었고 호기심을 충족시켜주는 것을 알려고 했으며 그런 것들을 노트북에 기록했습니다. 이는 과학자의 태도인 것입니다.
레오나르도에게 자연은 실험실과도 같았습니다. 그는 눈을 뜨고 바라볼 때 제대로 이해할 수 있는 것들을 보게 된다고 했습니다. 이는 과학자의 태도인 것입니다. 그는 퇴적작용으로 생긴 산에서 조개껍질과 해초화석을 발견하고 바다가 한때 대지를 덮은 적이 있다고 결론을 내렸습니다. 작은 구멍을 낸 종이를 벽에 대고 광선의 경로를 시위했으며, 어둠 속에서 횃불을 빠르게 움직여 불의 선을 보여주었습니다. 또한 류트의 줄이 진동할 때는 이중으로 보이는 것이나 탁상에 칼을 꽂아놓고 탁상에 진동이 생기게 하여 칼이 두 개로 보이는 환영을 보여주면서 눈이 빠른 속도로 움직이는 대상을 제대로 구분하지 못함을 지적했습니다.
그는 눈을 ‘영혼의 창문’으로 보고 관심을 기울였습니다. 당시 사람들은 눈에서 발하는 미립자들에 의해 영상이 생긴다고 보았지만 레오나르도는 눈이 발하는 것이란 아무것도 없고 광선을 받아들일 뿐이라고 주장했습니다. 해부학적으로 눈을 관찰한 그는 렌즈를 발견했습니다. 그는 눈이 이미지를 거꾸로 받아들인다고 생각했는데, 처음으로 입체영상의 원리, 즉 3차원 입체의 지각에 관해 언급했습니다. 당시 사람들은 한 순간에 빛이 세상에 가득 차게 된다고 믿었지만 그는 빛이 지나간다고 보고 빛의 속도에까지 관심을 기울였으며 빛이 어떻게 발산하는가에 대해서 오늘날 우리가 말하는 진동을 떨림이란 말로 표현했습니다. 그는 프랑스 수학자 페르마보다 한 세기 이전에 이런 근본적인 법칙을 아리스토텔레스에 근거해 “모든 자연적 현상은 가장 짧은 가능한 수단에 의해 나타난다”고 적었습니다. 당시 레오나르도가 과학에서 거둔 결실은 컸습니다. 그는 과거 누구도 궁금해 하지 않는 것들에 호기심을 갖고 다양한 분야에서 끊임없이 연구했으며 많은 성과를 거두었습니다.
7. 레오나르도 다 빈치가 인류에게 남긴 유산은 무엇이라고 보십니까?
레오나르도가 인류에게 남긴 유산이라면 현존하는 방대한 양의 그에 관한 책과 그에 대한 연구이겠습니다. 오늘 이 자리에서 그를 화제로 나누는 이야기가 바로 유산입니다. 왜 우리가 그의 생애를 기억하고 분석 이해하려고 하는 것입니까? 그가 후세에 끼친 영향인데, 한 마디로 실용주의 태도입니다. 앞서 언급한 <동방박사의 경배>에서 알 수 있듯이 그는 기존의 교리에 동조하지 않음으로써 새 시대가 요구하는 새로운 해석을 시도했습니다. 그 그림이 미완성이라는 것은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또한 그는 자연을 제대로 이해하여 인류에게 유익한 환경에 되게 했습니다. 인체의 해부를 통해 질병을 알아내고 질병을 방지하는 방법을 제시한 것, 이 모든 것에는 실용주의가 바탕에 깔려 있습니다. 인류의 안녕과 번영을 목적으로 하지 않았다면 그의 모든 과학적 업적은 성취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런 인물이 조국을 떠나 프랑스에서 뼈를 묻고 오늘날 무덤조차 존재하지 않게 된 것은 여간 불행한 일이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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