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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8. 징비록, 유성룡, 김흥식옮김, 서해문집, 2003

햇살처럼-이명우 2012. 5. 4. 13:13

288. 징비록, 유성룡, 김흥식옮김, 서해문집, 2003

임진왜란이 발생한 해는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듯이 1592년이다. 그러나 대부분의 역사적인 사건들이 그러하듯이 임진홰란이 발발하기 이전부터 전쟁의 기운은 극동아시아를 감돌고 있었다. 따라서 나라의 미래를 걱정하는 참된 관리라면 그러한 위기감을 느끼지 못했을리가 없다. 율곡이이가 십만양병설十萬養兵說을 주청한 것이 1583년으로 임진왜란 발발 10년 전이었다. 이 책의 저자 유성룡 또한 권율과 이순신을 조정에 천거, 향후 닥쳐올 국가적 변란에 대비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선비들은 훈구파니, 사림파니 파벌로 경쟁하고, 그 결과 수 많은 선비들의 목숨을 앗아가는 사화가 조정을 뒤덮고 있었다. 그 뿐 아니라, 조선초기의 정비된 국방체제는 점차 붕괴되어 위침을 방어햘 능력을 상실한 상태였다.
반면에 일본은, 15세기 후반부터 자국에 진출한 유럽상인들을 통해 서양의 문물을 받아들임으로써 봉건국가 체제에 비약적인 변화를 겪게 된다. 그 변화의 한 가운데에 서 있던 토요토미 히데요시는 혼란기를 성공적으로 수습, 국내 통일을 완수하게 되었다.
토요토미가 조선을 공격한 까닭은 잘 알려져 있다시피, 통일과정에서 경쟁했던 수 많은 제후들이 보유하고 있던 무력과 욕망을 대외적으로 분출시키고, 나아가 대륙침략을 감행하기 위함이었다.
이러한 내외적 상황은 예견된 전쟁을 방지할 만한 노력으로 이어지지 못했고, 급기야 1592년 왜군은 조선을 침략, 파죽지세로 조선 땅을 약탈하기에 이른다. 그러나 하늘을 찌를 듯했던 왜군의 기세는 평양성에서 멈추었고, 명나라 군대의 개입과 의병의 활약, 그리고 이순신 등 뛰어난 장수들의 노력으로 왜군은 후퇴의 길을 걷게 된다.
이후에도 정유재란(1597년 왜군의 2차 침입)으로 침략이 재발했지만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전쟁의 끝은 새로운 시대의 개막으로 이어졌다. 전쟁은 당사자인 조선과 일본, 그리고 참전국인 명나라, 명나라와 경쟁하던 청나라 등의 전쟁관련 국가들에게도 임진왜란이 끼친 영향은 대단히 컸다. 전쟁에 패한 일본은 토요토미 히데요시가 전쟁중에 사망하고, 그 뒤를 이어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정권을 장악했으며, 명나라는 전쟁수행에 따를 국력감소로 급지야 여진족인 청나라에 중국을 넘겨주고 말았다. 다만 전쟁의 직접 피해자인 조선의 정권은 붕괴하지 않았다. 그러나 조선정권이 유지되었다고 해서 문제가 없는 것은 아니었다. 기존의 지배층이 계속 그들의 지위를 유지한다는 것은 결국 전쟁의 피해가 피지배층, 즉 백성들에게 돌아간다는 사실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하였다.
전쟁 전에 170만 결에 이르던 조선의 경지면적이 전쟁후에는 54만 결로 줄어들었고, 군량미 조달을 위해 수 많은 백성들이 굶주림 속을 헤매야 했다. 그러한 결과 사람이 사람을 먹는 일까지 빈번히 발생하고, 이곳저곳에서 불만에 가득찬 자들은 백성을 선동, 난을 일으키곤 했다. 이러한 내용은 ,<징비록>에 동영상처럼 생생히 묘사되어 있다.
이러한 상황을 겪고 나서도 반성하지 않고 교훈을 얻지 못한다면 그야말로 책임있는 선비라고 할 수 없을 것이다.
나라의 질서는 무너지고 수 많은 문화유산은 불에 타 사라졌으며, 백성들의 삶이 도탄에 빠진 현실은 과연 누구의 책임이겠는가? 이에 대해 자신이 몸담았던 조정과 스스로의 잘못을 참회하고 반성하며, 임진왜란 전후의 냉정한 현실인시기을 통해 후손들에게 값진 교훈을 남겨준 이가 바로 유성룡이다.

유성룡(1542~1607)
중종 37년 경상도 의성지방 황해도 관찰사 유영중의 아들로 출생, 16세때 향시에 급제, 21세때 퇴계의 문하생, 25세에 문과급제, 임진왜란 때 좌의정, 도체찰사, 피난 중 개성에서 영의정이 됨. 반대파의 탄핵으로 관직삭탈 후 복직, 훈련도감제조를 맡아 군비를 강화하고, 인재를 배양하였다. 그러나 정유재란 이듬해 북인들의 탄핵을 받아 관직삭탈, 고향으로 돌아가 저술에 몰두. 66세에 별세, <서애집>, <영모록>, <징비록> 등을 남겼다.

<징비록> 국보 132호

징비懲毖란 시경<소비小毖>편에 "자기징이비후환子其懲而毖後患-내가 징계해서 후환을 경계한다"로 부터 유래한다.

'독산산성 세마대' - 권율, 가토 기요마사, 물지게, 물이 많은 것 처럼 보이려고 백마를 산 위로 올려 흰 쌀을 말에 끼얹어 목욕시키는 시늉을 하였다. 이를 본 왜군은 산꼭대기에 물로 말을 씻길 정도로 물이 풍부하다 오판하고 퇴각하였다.

2008. 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