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대적 함대가 서로 전멸을 걸고 싸우는 결전"
과거의 목조 범선으로 해전이 이루어졌으나(트라팔가 해전) 근대적 함대 끼리의 결전은 강철 방어판과 거포를 갖춘 증기 군함이 출현한 이래 최초의 예.
「포탄을 뚫고서 」(저자 가와다 이사오 해군 소령, 러일전쟁 당시 해군 소위)를 보니 과연 주인공이 이순신 장군의 영혼에게 기도하는 부분이 있었다.
"세계 제일의 해군 장수" 라고 저자가 말하는 이순신은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군대가 조선을 침략했을 때 해전에서 이를 무찌른 조선의 명장이다. 이순신은 당시 조선의 문무관리들 중에서 거의 유일하게 청렴한 인물로서 병사를 거느리는 재능과 전술능력, 그리고 그 충성심과 용기를 볼 때 실존했다는 것 자체가 기적이라고 생각될 정도의 이상적인 군인이었다.
영국의 넬슨 이전에 바다의 명장이랄 수 있는 사람은 세계사상 이 이순신을 제외하고 없었다. 이 인물의 존재는 조선에서는 그 후 오랫동안 잊혀져 왔지만, 오히려 일본 측에서 그에 대한 존경심이 계승되어 메이지 시대에 군인이 창설되자 그 업적과 전술이 연구되었다.
명장이라고 하는 것의 절대적인 이유는 재능이나 통솔능력 이상으로 적보다도 운이 좋은 사람이어야 한다는 점이었다. 비운의 명장이라는 것은 논리적으로 있을 수 없는 표현이며, 명장은 꼭 행운이어야만 하는 것이었다.
"함대라고 하는 것은 군함의 집합상태가 아니다. 함대는 함대훈련을 숙련되게 함으로써만 성립되는 것이다."
1904년 8월 10일 뤼순항 해전
도고는 일찍이
"해전이라는 것은 적에게 얼마나 피해를 주고 있는지를 알 수가 없다. 아군의 피해만 알기 때문에 언제나 자기 쪽이 지고 있는 듯한 느낌을 받는다. 적은 아군 이상으로 괴로운 법이다." 하는 그의 경험에서 나온 교훈을 병사들에 이르기까지 철저하게 가르쳐놓고 있었기 때문에 이 전투 중에 병사들은 누구나가 다 그 말을 기억해내서는 자기의 사기를 북돋우고 있었다.
"검에서 뿐만이 아니라 모든 일에서 만가지 방책을 다 써 보아도 궁지에 몰릴 때가 있다. 그럴 때는 적극적인 행동으로 나가라. 터무니 없는 짓이건 상관없다. 목숨을 건 행동으로 나가는 것이다. 이것이 우리파의 정수이다."
심형도류검법, 유파, 사토 데스타로 중령
구축함 : 적에게 육박해서 어뢰를 퍼붓는 무기
대부분 국가의 해군 형법에서는 네보가토프의 이러한 조치는 사형에 해당되도록 되어있었다. 분전을 한 다음의 항복이라면 '명예로운 항복'이 되는 것이지만, 싸우지 않고 적에게 항복해서 그 함선이나 무기들을 적에게 건네주었을 경우 그 지휘관은 사형되는 것이었다.
세계 해군이 세계 유일, 최대 모범으로 여겨왔던 트라팔가 해전에서조차 전승국인 영국해군은 그 승무원의 1할(10%)를 잃었고, 사령관인 넬슨은 기함 빅토리아호 함상에서 전사했으며, 적함대 32척 중 11척을 부순 불완전 승리였다. 그러나 이 쓰시마 해전에서는 아직 상세한 보고는 나와 있지 않지만, 러시아 함대의 주력함 전부를 겾침 또는 자침, 포획했다고 하는 당사자로서도 믿기 어려운 기적이 성립되었던 것이다.
(격침된 러시아 군함 : 전함이 6척, 순양함 4척, 해방함 1척, 구축함 4척, 가장 순양함 1척, 특무함 3척,
포획된 것 : 전함 2척, 해방함 2척, 구축함 1척
억루 : 병원선 2척
탈주 중 침몰 : 순양함 1척, 구축함 1척
탈주후 무장해제 6척(순양함 3척, 구축함 1척, 특무함 2척)
도주에 성공 : 요트를 개조한 작은 순양함 1척, 구축함 2척, 운송선 1척)
도고의 연함함대 해산사
마지막 구절
" ......신명은 오직 평소의 단련에 힘써서 싸우기 전에 이미 이길 수 있는 자에게 승리의 영예로운 관을 내림과 동시에, 한번의 승리에 만족해서 치평(治平)에 안주하는 자로부터는 금방 이것을 빼앗아버린다. 옛 사람이 말했다. 이긴 다음에 투구끈을 단단히 매라고."
"러시아 육군은 국민의 군대가 아니니까."
"나폴레옹은 프랑스 사상 최초인 국민군을 이끌고 있었기 때문에 강했던 것이다."
아키야마 요시후루는 종2위, 훈1등 공2급 육군대장이라는 높은 지위까지 올라갔던 사람이 시골 사림중학교의 교장을 맡는다는 것은 당사자로서는 생각할 수 없는 일이었다. 집도 도쿄의 작은 전셋집이었고 마쓰야마의 집은 그의 생가 그대로였으며, 평생 후쿠자와 유키치를 존경했고 그 평등사상을 좋아했다.
요시후루가 죽었을 때 그의 지기들은
"최후의 무사가 죽었다."
라고들 말했는데, 파리에서 무사도를 주장했던 노기 마레스키 보다도 어쩌면 요시후루 쪽이 극히 자연스러운 무사다움을 갖추었던 사람이었는지도 모른다.
사네유키는 중장까지 진급했고, 만 50세로 만성뇌막염으로 사망했다.
요시후루는 71세까지 살다가 당뇨와 탈저로 사망했다.
2009. 12. 13 일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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