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5. 만들어진 신(The God Delusion), 리처드 도킨스, 김영사, 2007
"누군가 망상에 시달린다면 정신이상이라고 한다. 다수가 망상에 시달리면 종교라고 한다" - 로버트 퍼그시 「선과 오토바이 관리기술」의 저자
종교룰 굳이 언급하고 싶다면 '카톨릭 신자의 아이'라고 말하라. ......이슬람신자의 아이다......이슬람계 아이 같은 것은 없다. 카톨릭계 아이 같은 것도 없다.
1999년 미국인들을 대상으로, 후보자가 한 가지 사실 - 여성, 카톨릭신자, 유대인 등등 - 만 제외하면 나무랄게 없을 때 그에게 표를 주겠느냐는 여론조사 결과 여성(95%), 카톨릭 신자(94%), 유대인(92%), 흑인(92%), 모르몬교도(79%), 동성애자(79%), 무신론자(49%)의 순으로 표를 주겠다는 응답이 나왔다.
칼 세이건 <창백한 푸른 점>
스티븐 호킹 <시간이 역사>
스티븐 와인버그 <최종 이론에의 꿈>
뉴욕의 한 랍비는 이렇게 말했다. "아인슈타인은 위대한 과학자임에 분명하다. 하지만 그의 종교관은 유대교와 정반대편에 있다."
'하지만?' 하지만 이라니? 왜 '그리고'가 아닌가?
'......종교는 지식이 아니라 신앙에 토대를 두고 있습니다.'
칼 세이건 "신이라는 말이 우주를 지배하는 물리법칙들을 의미한다면, 그런 신은 분명히 존재한다. 이 신은 정서적인 만족을 주지 않는다......중력법칙을 향해 기도한다는 것이 말이 되는가?"
나는 물리학자들이 비유적인 의미로 신이라는 단어를 사용하지 말았으면 한다. 물리학자들의 비유적 또는 범신론적 신은 성서에 나오는, 그리고 사제와 이맘과 랍비가 말하는 신 즉, 인간사에 간섭하고 기적을 일으키고, 우리 생각을 읽고, 죄를 벌하고, 기도에 답하는 신과 아득히 멀다. 둘을 일부러 혼동시키는 것은 지적인 반역행위다.
H.L 멘켄 "우리는 동료의 종교를 존중해야 하지만, 자신의 아내가 아름답고 아이들은 영리하다는 그의 이야기를 존중하는 것과 같은 의미에서 그리고 그런 한도 내에서만 존중해야 한다.
나는 어느 특정한 형태의 유일신이나 여러 신을 공격하는 것이 아니다. 나는 어디에선가 날조되었거나 언젠가 날조 될 초자연적인 모든 것, 모든 신들을 공격한다.
당신의 빨강이 내 초록과 같은지를 내가 알 수 없다고 해서 확률이 50%가 되는 것은 아니다. 제시된 명제는 너무나 무의미해서 확률이라는 이름으로 부를 수가 없다. 그럼에도 우리는 신의 존재 문제가 원칙적으로 대답할 수 없는 것이라는 전제로부터 그의 존재와 비존재가 동등한 확률을 갖는다는 결론으로 건너뛰는 오류를 흔히 접하게 된다.
"우리가 죽어도 우리 몸의 원자들(그리고 에너지)은 사라지지 않지요. 따라서 우리는 불멸입니다."
기록에 있다고해서 다음과 같은 질문을 금지해서는 안된다. "그 기록은 누가 언제 썼을까? " " 그들은 그 내용을 어떻게 알았을까?" "당시에 그들은 우리 시대에 우리가 이해하는 것과 같은 의미로 기록을 한 것일까?" "그들은 편견없는 관찰자 였을까? 아니면 어떤 의도를 지니고 있었을까?"
아무튼 예수가 정말로 처녀에게서 태어났다면, 요셉의 족보는 그와 아무 상관이 없으므로 메시아가 다윗의 후손이어야 한다는 구약성서의 예언을 예수에게 맞추기 위해 그 족보를 동원하는 것 자체가 무의미하다.
설게자를 설계한 것은 대체 누구란 말인가?
우리의 태양과 같은 항성 주위에는 이른바 골디락스 영역(Goldilocks zone)이 있다. 너무 뜨겁지도 않아서 그 영역에 있는 행성에는 물이 있을 수 있다.
생명이 한 행성에서 자연적으로 출현할 확률이 10억분의 1이라고 해도, 그렇게 경이로울 정도로 있을법하지 않은 사건은 10억개의 행성에서 일어날 것이다.
"암이 낫도록 해달라는 기도에 신이 응답한다면 암은 더 이상 인류가 해결해야 할 문제가 아닐것"이기 때문에 신은 결코 응답해서는 안될 것이다. 신이 응답한다면, 우리에게 무슨 할 일이 있겠는가?
조지 버나드 쇼(George Bernard Shaw) "신자가 회의주의자 보다 더 행복하다는 사실은 술취한 사람이 멀쩡한 사람보다 더 행복하다는 사실만큼이나 말이 안된다."
마르틴 루터
"이성은 신앙의 가장 큰 적이다. 그것은 영적인 것에 결코 도움이 되지 않으며, 신으로부터 흘러나오는 모든 것을 경멸함으로써 신의 말씀에 맞설 때가 한 두번이 아니다."
"기독교인이 되고자 하는 사람은 누구든 이성으로부터 시선을 돌려야 한다."
"모든 기독교인은 마음속에서 이성을 파괴해야 한다."
종교에서 진리는 그저 살아남은 견해를 지칭한다 -오스카 와일드-
자기 복제자 - 유전자, 컴퓨터 바이러스, 밈(문화적인 유전의 단위)
* 하우저의 궁지 : 하버드의 생물학자, 마크 하우저 <도덕적 마음>
'달리는 화차'
더 니즈라는 사람이 분기점에서 열차선로를 바꾸어 다섯명으 목슴을 살릴 수 있는 위치. 옆 선로에는 한 남자가 꼼짝달싹 못하고 있다. 대부분 도덕적으로 용납된다는 데 동의(90%), 열차를 세울 수 있는 물체, 그것이 일몰을 감삼하는 사람, 부도덕하다는데 동의.
* 연못에 아이가 빠졌다. 주위에 달리 도와줄 사람이 보이지 않는다. 당신이 아이를 구한다면 바지가 젖을 것이다. 97%가 아이를 구하는데 동의했다.구해야 한다(의무)(놀랍게도 3%는 바지를 지키는 쪽을 선택했다)
* 장기이식과 관련한 궁지, 97%는 대기실에 있는 건강한 사람을 희생시켜 그의 장기로 다섯명을 구하는 것이 도덕적으로 금지된 것이라는데 동의
<하우저와 피터 싱어(도덕철학자)의 공동 실험>
3가지 가상 행동 제사, 그것이 도덕적으로 '의무적인' 것인지, '용납되는' 것인지, '금지된' 것인지 택하게 했다. 그 결과가 위와 같이 나왔다.
기이한 책
수 많은 익명의 저자, 편집자, 집필자등이 9세기에 걸쳐 지리멸멸한 문서들을 혼란스럽게 엮고, 짓고, 수정하고, 번역하고, 왜곡하고, '개정한' 선집에서 기대할만한 그런 양상을 보여준다. ......그러나 불행히도 광신자들은 바로 그 기이한 내용들을 오류 없는 도덕의 근원이자 가치관이라고 말한다.
구약성서
신학자들은 우리가 더 이상 <창세기>내용을 곧이 곧대로 받아들이지 않는다고 화를 내며 항변할 것이다. 바로 그것이 내가 말하고자 하은 요지다. 우리는 성서에서 어느 부분은 골라서 믿고, 어느 부분은 상징이나 우화로 간주한다. 그렇게 취사선택하는 행위는 무신론자가 절대적인 근거없이 이 도덕규정이나 저 도덕규정을 따르는 것과 마찬가지로 개인적인 판단의 문제다. 어느 한 쪽이 '직감에 좌우되는 도덕'이라면 다른 한 쪽도 그렇다.
2005년 뉴올리언스라는 멋진 도시가 허리케인 카트리나로 물에 잠기는 재앙을 겪었다. 그런데 미국의 가장 유명한 텔레비젼 복음 전도사 중 한 명이자 대통령 후보로 나선 적도 있는 팻 로버트슨(Pat Robertson)목사가 뉴올리언스에 살고 있는 레즈비언 코메디언 때문에 허리케인이 닥친 것이라고 말했다는 기사가 신문에 실렸다. 단지 레즈비언 코메디언의 집이 거기에 있다고 해서 도시전체를 파괴하기 보다는 아마도 현명하게 그녀에게 심장마비를 내리지 않았을까?
소돔과 고모라
소돔에서 살아남은 가장 도덕적인 아브라함의 조카 롯
롯은 두 딸을 임신시켰다.
아브라함 이야기
자신의 아들 이삭을 번제물로 바치기 위해 제단을 쌓고, 이삭을 묶고 살상용 칼을 손에 쥐었을 때, 천사가 개입한다. 신이 농담을 한 것이다.
현대의 도덕주의자들은 그런 심리적 외상을 아이가 어떻게 극복할 수 있었는지 궁금해하지 않을 수 없다. 현대이 도덕기준으로 보면, 이 수치스러운 이야기는 아동학대이자, 비대칭적 권력관계에서 오는 핍박이자, 뉘른베르크 전범 재판 때 나오는 것 같은 변명이 처음으로 기록된 사례다. "나는 명령에 따랐을 뿐이다." 하지만 그 전설은 세 개의, 유일신 종교의 중요한 기반이 된 신화들 중 하나다.
도덕적인 교훈으로?
......지금 내가 입증하려는 것은 오로지 우리가 경전으로부터 도덕을 끌어내지 않는다는 것 뿐이다. 혹은 만일 거기에서 도덕을 이끌어 낸다면, 우리는 경전에서 멋진부분만 취사선택하고 불쾌한 부분은 거부한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느 것이 도덕적인 것인지를 판단하는, 어떤 별도의 기준을 지녀야 한다. 그 기준은 어디에서 나오든 경전 자체에서 나올 수는 없으며, 우리가 종교인이든 아니든 이용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여호수아서> 6장 21정 예리코 전투
요점은 사실이든 아니든 성경이 우리의 도덕적 원천으로 우리에게 제시되고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여호수아가 예리코를 파괴한 이야기를 비롯한 약속의 땅을 침략하는 과정을 담은 성경의 이야기는 히틀러의 폴란드 침략, 사담 후세인이 쿠르드족과 습지 아랍인 대량학살과 구분할 수 없다. 성경이 인상적이고, 시적인 소설작품일 수 있겠지만, 그것은 당신이 자식들에게 도덕을 함양하라고 줄 만한 책은 아니다.
<레위기>20장에 따르면 다음의 죄들은 죽음의 처벌을 받아 마땅한 것들이다. 부모를 비방하는 것, 불륜을 저지르는 것, 계모와 며느리와 성관계를 갖는 것, 동성애, 모녀와 동시에 혼인하는 것, 수간(그리고 그 불운한 동물도 도살한다), 물론 당신도 처형된다, 안식일에 일했다는 이유로. 그 점은 《구약성서 》 전체에 되풀이 해 나타난다. <민수기> 15장에서 이스라엘 사람들은 그 금지된 날에 한 남자가 야외에서 장작을 모으는 것을 보았다. 그들은 그를 붙잡은 뒤 신에게 어떻게 처리할 지 물었다. 신은 그날 대충 넘어갈 기분이 아니었던 것이 분명하다. "하느님은 모세에게 그를 처형하라고 말했다. 모두 그를 야영지 밖으로 끌어내어 돌로 쳐 죽여라" 그의 아내와 아이들은 손진하게 땔감을 모은 그를 위해 슬퍼했을까? 그는 첫 번째 돌이 날아올 때 두려움에 흐느꼈을까, 돌들이 마구 머리를 때릴 때 고통에 울부짖었을까?
오늘 날 내게 충격을 주는 것은 그런 이야기들이 실제로 일어났다는 것이 아니다. 아마 그런 일은 없었을 것이다. 내 입을 쫙 벌어지게 만드는 것은 오늘날 사람들이 야훼같은 섬뜩한 역할 모델을 자기 삶의 기반으로 삼고 있으며, 설상가상으로 나머지 사람들에게 사실이든 허구든, 그 사악한 괴물을 받아들이라고 강요한다는 것이다.
<신약성서>에는 ......기독교 핵심교리, '원죄', '속죄'가 그렇다. ......원죄 자체는 구약성서의 아담과 이브 신화로부터 직접 도출된다. 그들의 죄(금지된 나무의 과실을 먹는 것)는 그저 꾸지람을 듣고 끝낼 정도에 불과해 보인다. 그러나 그 과일을 훔치는(scrumping) 탈선행위를 한 그들은 모든 죄악의 부모가 되기에 충분한 상징성(선악의 지식, 현실적으로는 자신들의 벌거벗었음을 알게된 것)을 지니고 있었다. 그들과 그들의 모든 후손들은 에덴동산으로부터 영구히 추방되었고, 영생이라는 선물은 빼앗기고, 대대로 밭에서 일하고 출산하는 고역에 처해졌다.
이렇게 보니 응징이 너무 심하다. 하지만 《구약성서 》에서는 흔한 일이다. 《신약성서 》는 《구약성서 》조차도 따라올 수 없는 악의가 담긴 새로운 가학피학증을 완성함으로써 새로운 부정의를 추가한다. 생각해보면 특정종교가 고문 및 처형기구를 신성한 상징으로 채택하고, 그것을 때로 목에 걸기도 하다니 놀랍기만 하다. 레니 부루스(Lenny Bruce)는 이를 제대로 꼬집었다. "만일 예수가 20년 전에 죽었다면, 카톨릭 신자들은 목에 십자가 대신 작은 전기의자를 걸고 다닐 것이다."
아담과 이브의 죄는 부계에 따라 전달된다고 여겨진다. 아우구스투스는 정액을 통해 전달된다고 보았다. 모든 아이들, 심지어 태어나기 전의 아이들까지 까마득히 먼 조상의 죄를 물려받았다고 주장하는 윤리철학은 대체 어떤 것일까? 이왕 이름이 나왔으니 하는 말인데, 스스로 죄에 관해 일가견이 있다고 여겼던 아우구스티누스가 바로 '원죄'라는 말을 만들어 낸 인물이다. 그 이전에는 그것을 '조사의 죄'라고 했다. 아우구스투스의 선언과 논의는 초기 신학자들이 죄에 병적으로 몰두했음을 드러낸다.
나는 기독교의 핵심교리인 속죄가 악의적이고 가학피학적이고 혐오스럽다고 말했다. 또 우리는 그것을 개가 짖는 소리로 치부해야 하지만, 그것에 너무 익숙해져서 객관성이 무뎌져 있다. 신이 우리의 죄를 용서하고 싶다면, 스스로 고문당하고 처형당하는 대가를 지불하지 않고 그냥 용서하지 않는 이유는 무엇일까? 굳이 그렇게 함으로써 먼 미래세대의 유대인들이 '그리스도 살해자'라고 박해받고 학살당하도록 한 이유가 무엇이란 말인가. 또 유전되는 죄는 정액에 담겨서 전달되었을까?
*** 타마린의 실험, 이스라엘의 심리학자 조지 타마린(George R. Tamarin)
- 8~14세 이스라엘 아이 1,000명에게 <여호수아서>에 나오는 예리코 전투 장면을 읽어주었다.
「여호수아가 사람들에게 외쳤다. "고함을 쳐라. 주께서 저 도시를 너희에게 주셨다. 저 도시와 그 안에 있는 모든 것들을 파괴하여 주께 바쳐라. 하지만 금이나, 은 , 동이나 철로 만든 집기들은 모두 주께 바칠 것이다. 그것들은 주의 금고에 넣을 것이다."......그들은 남녀노소, 소, 양, 나귀 등 도시의 모든 것을 칼로 모조리 없앴다.......그리고 도시와 그 안의 모든 것들을 불태웠다. 오직 은과 금, 동이나 철로 된 집기들만 모아 주의 집에 있는 금고에 넣었다.」
- 도덕-문제 : "여호수아와 이스라엘 사람들이 올바른 행동을 했다고 생각하니?" 답 : A(전적으로 찬성), B(일부찬성), C(전적으로 반대)
- 결과 : 66% 전적으로 찬성(A), 8% 일부 찬성(B), 26% 전적으로 반대(C)
- 전적으로 찬성한 집단(A)의 전형적인 대답 세 가지
1. 나는 여오수아와 이스라엘 사람들이 올바른 행동을 했다고 생각하며 이유는 이렇다. 신은 그들에게 이 땅을 약속했고 정복하라고 허가했다. 그들이 그런 식으로 행동하지 않거나 아무도 죽이지 않았다면, 이스라엘 사람들은 이교도들에게 동화될 위험에 처했을 것이다.
2. 내 생각에 여호수아가 그렇게 한 것은 옳았다. 한 가지 이유는 신이 이스라엘 부족들이 그들에게 동화되어 나쁜 행동을 배우지 않도록 그들을 전멸시키라고 명령했기 때문이다.
3. 그 땅에 사는 사람들이 다른 종교를 가지고 있었고, 여호수아가 그들을 죽여 그들의 종교를 세상에서 없애버렸기 때문에 드는 옳았다.
여호수아의 대량학살을 정당화하는 근거는 어느모로 보나 종교적이다.
<타마린의 다른 실험>
이스라엘 아이 168명을 대상으로, <여호수아>의 같은 대목을 읽어주면서 여호수아라는 이름 대신 '린 장군', '이스라엘' 대신에 '3000년 정의 중국왕조'라고 넣었다. 결과는 정반대였다. 린 장군의 행동에 찬성한 사람은 7%에 불과했고, 75%는 반대했다. 다시말해 유대교라는 요소를 고려사항에서 제외시키자, 대다수 아이들은 현대인의 다수가 지닌 도덕적 판단과 일치하는 의견을 냈다. 여호수아의 행위는 집단학살 행위였다. 그러나 종교적 관점을 취하면 모든 것이 다르게 보인다. 그리고 그 차이는 삶의 초기부터 나타나기 시작한다. 아이들에게 대량학살을 비난하거나 용납하게 하는 등 견해차이를 빚어내는 것이 바로 종교였다.
여성들은 참정권을 민주주의 국가에서 보편적 현상이라 생각하지만......참정권(여성)이 부여된 연대는
뉴질랜드 1893년
오스트레이리아 1902년
핀란드 1906년
노르웨이 1913년
미국 1920년
영국 1928년
프랑스 1945년
벨기에 1946
스위스 1971년
쿠웨이트 2006년
아마 과학자들은 '진리'라는 것의 의미를 어떤 추상적인 방식으로 정의한다는 점에서 '근본주의자'일 것이다. 하지만 누구나 그렇게 한다. 내가 뉴질랜드가 남반구에 있는 것이 사실이라고 말할 때, 근본주의자가 아니듯이 진화가 사실이라고 말할 때도 나는 근본주의자가 아니다. 우리는 증거가 진화를 뒷받침하기 때문에 진화를 믿으며, 그것을 반증하는 새 증거가 나오면 단번에 그것을 버릴 것이다. 진짜 근본주의자라면 결코 그렇게 말할 수 없을 것이다.
내가 대학생시절이던 옥스포드 대학교 동물학과에 재직중이던 존경받는 노학자의 이야기.
그는 아주 오랜 세월 골지체(세포속의 미세한 구조 중 하나)가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 것이라고 열정적으로 믿었고 그렇게 가르쳤다. 인위적으로 생성된 환각에 불과하다는 것이었다. 월요일 오후가 되면 학과생 전원이 초쳥연사의 강의를 듣곤 했다. 어느 월요일 미국의 세포학자가 초청되어 골지체가 실제한다는 아주 확실한 증거를 제시했다. 강연이 끝나자 노학자는 강당앞으로 천천히 걸어나가 그 미국인과 악수를 하면서 열띤 어조로 말했다. "친애하는 동료여, 감사를 표하고 싶습니다. 지난 15년 동안 내가 잘못 생각했습니다." 우리는 손이 빨개지도록 박수를 쳤다. 근본주의자는 결코 그런 말을 할 수가 없다.
낙태는? 찬성, 반대
반대 : 배아는 '아기'이고, 그것을 죽이는 것은 살인이다. 끝.
이 절대론적 태도로부터 많은 것이 파생된다.
우선 배아줄기세포 연구는 중단되어야 한다. 그것이 의학적으로 엄청남 잠재력을 지니고 있다해도 말이다. 그 연구가 배아세포의 죽음을 수반하기 때문이다. 그 논리의 모순은 사회가 이미 체외수정 시술을 받아들였다는 점을 생각하면 명백히 드러난다. 체외수정 시술 때 의사들은 난자가 더 많이 나오도록 여성을 자극한 후 배출된 난자들을 몸 바깥에서 수정시킨다. 생존 가능한 접합자가 십여개 생성되면, 그 중 두 세개를 자궁에 이식한다. 그 중에서 겨우 하나나 두개가 살아남을 것으로 기대된다. 이렇게 체외수정을 하는 과정에서 배아가 죽지만, 사회는 거기에 아무런 문제를 제기하지 않는다. 지난 25년간 체외수정은 불임부부의 인생에 기쁨을 알려주는 표준적인 시술과정이 되어왔다.
나는 잉태된 배아의 대다수가 자연적으로 유산된다는 것을 그들이 알면 뭐라고 할지 궁금하다. 그것은 일종의 자연적인 '품질관리'로 보는 편이 타당하다.
특정한 부류의 종교인은 미세한 세포덩어리를 죽이는 것과, 다 성장한 의사를 죽이는 의 도덕적 차이를 분간하지 못한다.
'마이클 브레이'목사와 그의 친구 '폴 힐'목사
1994년 힐은 임신중절을 시술하는 의사인 존 브리턴과 그의 경호원을 플로리다 주 펜스콜라에 있는 브리턴의 병원 앞에서 총으로 사살했다. 그런 다음 경찰서로 제발로 찾아가서 미래의 '천진난만한 아기들의 죽음'을 막기 위해 그 의사를 죽였다......2003년 힐은 브리턴과 그의 경호원을 살해한 혐의로 사형에 처해졌다.
"그들은 고통을 느낄까?" 밴담의 질문
폴 힐은 고통을 느낄 수 있는 신경계를 지닌 존재들에게 현실적이고, 깊고, 지속적인 고통을 안겨주었다. 그와는 달리 그에게 희생된 의사는 그런 일을 결코 하지 않았다. 신경계가 없는 초기배아는 고통을 겪지 않음이 분명하다. 그리고 신경계가 발달한 뒤 낙태된 배아가 고통을 겪는다면-비록 모든 고통은 슬픈 것이지만- 그것은 그들이 인간이기 때문에 겪는 고통이 아니다. 얼마만큼 자랐든 인간의 배아가 같은 발달 단계에 있는 소나 양의 배아보다 더 고통을 겪는다고 가정할 이유는 전혀없다. 그리고 인간이든 아니든, 모든 배아가 도살장에 있는 소나 양보다 고통을 훨씬 덜 느낀다고 가정하는 것이 어느모로 보나 합리적이다. 특히 종교의식에 쓰이기 위해 목이 잘릴 때까지 온전히 의식을 유지하고 있어야 하는 동물들에 비하면 더욱 그렇다.
위대한 베토벤 오류, 모리스 바링(1874~1945)
임신한 여성이 있습니다.
"임신 중절에 관한 견해를 듣고 싶습니다. 아버지는 매독환자이고 어머니는 결핵에 걸렸습니다. 이미 자식을 넷이나 낳았는데, 첫째는 맹인이었고, 둘째는 사산했고, 셋째는 농아였고, 넷째는 결핵에 걸렸지요. 당신이라면 어찌했겠습니까?"
"임신 중절을 시켰겠지요."
"그러면 당신은 베토벤을 살해한 겁니다."
* 베토벤은 장남이고, 어머니만 결핵으로 죽었다. 금욕때문에 베토벤을 잃는 것이 아니듯이 낙태로 베토벤을 잃는 것도 아니다.
"X는 참이다"와 "X가 참임을 믿는 것이 바람직하다"의 차이를 구분하지 못하는 듯한 사람들이 놀라울 정도로 많다.
<창백한 푸른 점> 칼 세이건
<생명사랑> 에드워드 윌슨
<과학과 영혼> 마이클 셔머
<확언들> 폴 커츠
<풀리지 않는 무지개> 리처드 도킨스
2011. 4.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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