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읽기

515. 의지와 표상으로의 세계, 아르투르 쇼펜하우어, 동서문화사, 2012

햇살처럼-이명우 2016. 9. 26. 17:53

515. 의지와 표상으로의 세계, 아르투르 쇼펜하우어, 동서문화사, 2012

제1권 표상으로서의 세계에 대한 제1고찰 : 충족 이유율에 따른 표상, 경험과 학문의 목적

1. 세계와 나
'세계는 나의 표상이다.'

참되고 순수한 직접적 의지행위는 모두 그대로 직접적으로 외부에 나타나는 육체행위이다. 그리고 여기에 따라서 한편으로 육체에 끼치는 작용은 모두 직접적인, 또는 의지에 대한 작용이다. 그 작용을, 그 자체로서는 의지에 거슬리는 경우에는 고통이라고 부르고, 의지에 맞는 경우에는 유쾌 또는 쾌락이라 부른다.

"우아란 동작하는 사람과 그 동작의 고유한 관계다" 빙켈만,<저작집>

인간의 의지는 노력하고 충족되고, 이렇게 영원히 계속하는 것이 인간의 본질이다. 오히려 이렇게 소원에서 충족으로 옳겨지고 또한 충족헤서 새로운 소원으로 빨리 옮겨가는 것이야말로 인간의 행복이고 안녕이다. 충족을 얻지 못하는 것은 괴로움이고, 새로운 소원이 없는 갈망은 권태, 즉 지루함이기 때문이다.

의지의 자기인식이 행위와 세계일 뿐이다. 의지는 자신을 규정하는 것과 더불어 행위와 세계를 규정한다. 왜냐하면 의지 밖에는 아무것도 없고, 행위와 세계는 의지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의지는 '물자체'이고 세계의 내적 실질이며 본질적인 것이지만, 생과 가시적 세계, 현상은 의지의 거울에 불과하다. 그래서 마치 육체에 그림자가 따르는 것처럼, 의지에는 생과 세계, 현상이 불가분으로 따른다. 그리고 의지가 있는 곳에는 생과 세계도 있다.

의지의 객관화는 본질적으로 현재의 형식이다. 이 형식은 연장이 없는 점으로서 과거와 미래에 걸쳐 무안한 시간의 절단하여, 마치 서늘한 저녁이 없는 영원한 정오처럼 움직일 수 없이 고정되어 있다. 마치 태양이 밤의 품에 빠져버린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 태양은 끊임없이 타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다. 그러므로 사람이 죽음을 절멸이라고 무서워하는 것이라면, 그것은 태양이 저녁 때 "아, 슬프다. 나는 영원한 밤 속으로 빠져들어간다."고 탄식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과 다를 것이 없다.
또 이와 반대로 생의 무거운 짐에 짓눌린 사람, 생을 좋아하고 생을 긍정하지만 생의 고뇌를 싫어하고 특히 자기의 몸에 엄습해온 가혹한 운명을 더 이상 참을 수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 그러한 사람은 죽음으로부터 해탈을 기대할 수 없고 자살로 구제받을 수도 없다. 캄캄하고 차디찬 저승이 안식처로서 그의 마음을 끈다는 것은 착각에 지나지 않는다. 지구는 회전하여 낮에서 밤으로 되고 개체는 죽는다. 그러나 태양은 끊임없이 불타는 영원한 낮이다. 생에 대한 의지에서 생은 확실하고, 생의 형식은 끝없는 현재며, 이데아의 현상인 개체들이 시간속에서 생멸하는 것은 어쨌든 잠깐 동안의 꿈에 비교할 수 있다. 따라서 자살은 무익한 것으로 보이고, 또한 어리석은 행위다. 우리가 더 고찰해 가면, 자살은 더 좋지 않은 것으로 밝혀질 것이다.

의지와 그 잠정적인 목표사이에 생기는 장해로 의지가 저지되는 것을 '고뇌'라고 부르고, 이와 반대로 목표가 달성되는 것을 만족,쾌적, 행복이라고 부른다.

괴로울 때엔 마음의 평정을 보존하려는 노력을 언제나 잊지 말 것이며, 행복할 때엔 과도하게 기뻐하는 것을 삼가라. -호라티우스-

우리가 소망하는 것을 얻지못하는 동안, 그 가치는 모든 것을 능가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것을 얻고나면 곹 다르게 보이고, 비슷한 욕망이 우리를 사로 잡아, 우리는 언제나 생을 갈구한다. -루크레티우스-

행복이란 모두 소극적인 것에 불과하며, 본질적으로 적극적인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영속적인 만족이나 행복은 있을 수 없고 언제나 고통 또는 결핍에서 해방시켜주는 것에 불과하다. 그 후에는 새로운 고통이 생기거나 무기력, 헛된 갈망, 권태 등이 뒤따르게 된다.

2013. 4. 6. 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