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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7. 프레임(Frame) 나를 바꾸는 심리학의 지혜, 최인철, 21세기북스, 2008

햇살처럼-이명우 2016. 9. 28. 11:14

517. 프레임(Frame) 나를 바꾸는 심리학의 지혜, 최인철, 21세기북스, 2008

"나는 세상을 강자와 약자, 성공과 실패로 나누지 않는다. 나는 세상을 배우는 자와 배우지 않는 자로 나눈다." -사회학자, 벤자민 바버(Benjamin Barber)

상위 프레임은 WHY를 묻지만, 하위 프레임은 HOW를 묻는다.
상위 프레임에서는 왜 이 일이 필요한지, 그 이유와 의미, 목표를 묻는다. 비전을 묻고, 이상을 세운다. 그러나 하위 수준의 프레임에서는 그 일을 하기가 쉬운지 어려운지, 시간은 얼마나 걸리는지, 성공가능성은 얼마나 되는지 등 구체적인 절차부터 묻는다. 그래서 궁극적인 목표나 큰 그림은 놓치고 항상 주변머리의 이슈들을 쫒느라 에너지를 어비하고 만다. 따라서 상위 수준의 프레임을 갖고 있는 사람은 No 보다 Yes를 자주 대답하고, 하위 수준의 프레임을 가진 사람은 Yes 보다는 No라는 대답을 많이 한다.

접근 프레임은 보상에 주목하기 때문에 어떤 일의 결과로 얻게 될 보상의 크기에 집중하고 그것에 열광한다. 그러나 회피 크레임은 실패 가능성에 주목한다. 자칫 잘못하다가는 실수할 수 있다는데 주목하고, 보상의 크기보다는 처벌의 크기에 더 큰 영향을 받는다.

아버지와 아들이 야구경기를 보러가기 위해 집을 나섰다. 그런데 아버지가 운전하던 차의 시동이 기차 선로 위에서 갑자기 꺼져 버렸다. 달려오는 기차를 보며 아버지는 시동을 걸려고 황급히 자동차 키를 돌려보았지만 소용이 없었고, 결국 기차는 차를 그대로 들이받고 말았다. 아버지는 그 자리에서 죽었고, 아들은 크게 다쳐 응급실로 옮겨졌다. 수술을 하기 위해 급히 달려온 외과의사가 차트를 보더니 "난 이 환자의 수술을 할 수가 없어. 얘는 내 아들이야!" 라며 절규하는 것이 아닌가?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할까? 아버지는 아들과 사고를 당한 뒤 그 자리에서 죽지 않았던가? 혹시 의사가 친아버지이고, 야구장에 같이 간 아버지는 양아버지였을까?
의사가 아들의 '엄마'라면~

당신이 조금이라도 이 시나리오를 의아하게 생각했다면 그 이유는 당신이 '외과의사 = 남자' 라는 전통적인 프레임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당신이 성 고정관념에서 자유로운 사람이었다면 곧바로 그 의사가 엄마였을 거라고 짐작했을 것이다. 그러나 불행히도 외과의사가 엄마라는 것을 짐작하는 사람은 소수에 불과 하다. 응급수술을 담당하는 외과의사로 거의 자동적으로 남자를 떠올린 대다수의 사람들은 인류 역사를 통해 뿌리 깊게 형성돼온 젠터 프레임의 희생양이 된 셈이다.

History = Historia 그리스어, '탐구를 통해 배우는 행위'

식욕이 식사량을 결정하기 보다 그릇의 크기가 식사량을 결정한 것이다. 왜 이런 일이 발생할까? 그것은 그릇의 크기가 프레임으로 작동하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기본적으로 제시되는 양이 '사회적으로는 바람직한 평균적인 양'인 것으로 해석하는 경향이 있다. 그래서 그릇이 큰 경우에는 남기는 것에 대한 죄책감을 느끼게 만들고, 그릇이 작은 경우 더 먹게 되면 '너무 많이 먹는 것 아니냐'는 불안감을 경험하게 된다. 물론 아무도 이런 생각을 강요하지는 않는다. 다만 눈 앞에 제시된 그릇의 크기가 프레임으로 작동하면 그 양이 '표준'이라고 여기도록 유도하는 것이다.

지혜가 간구의 대상인 것은 분명하지만 동시에 지혜는 끊임없는 훈련의 대상이기도 하다. 지혜는 오랜 연륜을 필요로 하지만 교육을 통해서도 얼마든지 얻을 수 있다. 그래서 지혜 연구의 대가인 예일대학교의 로버트 스턴버그(Robert sternberg)교수는 학교 교육과정에 지혜를 가르치는 과목을 포함시켜야 한다고 강력하게 주장한다. 지혜가 이처럼 기다림의 대상이 아닌 적극적인 훈련의 대상이 될 수 있는 이유는, 지혜의 본질이 우리들 마음의 한계를 지각하는데 있기 때문이다.
운 좋게도 오늘날 우리는 무수한 학자들이 이뤄놓은 심리학, 신경과학, 경제학 등의 연구성과들을 통해 마음의 한계에 대해 체계적으로 손쉽게 배울 수 있게 되었다. 그 가르침의 가운데에 바로 프레임이 자리잡고 있다.

문제 : 화씨 50도는 섭씨로 몇 도인가?

  누군가 이 문제의 답을 신속하게 풀었을 때, 우리는 그를 똑똑한 사람이라고 부를지언정 지혜로운 사람이라고 하지 않는다. 이 문제를 눈깜짝할 사이에 풀어내는 계산기를 붙들고 '지혜로운 계산기'라며 떠받들지도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이 문제는 단 하나의 분명한 정답이 존재하고, 그 답은 누구나 공식에 맞춰 쉽게 도출할 수 있기 때문이다. [(화씨-32)/1.8] 답. 섭씨 10도. 수학자나 인지심리학자들은 이와 같이 분명한 답이 존재하는 문제를 '잘 구조화된 문제' 혹은 '잘 정의된 문제'라고 부른다.

  반면, 지혜를 필요로 하는 문제는 '잘 구조화 되지 않은 문제' 혹은 '잘 정의되지 않은 문제'들이다. 예를 들어 '미군은 이라크에서 철수해야 하는가?'라는 문제나, '부부가 이혼할 경우 자녀의 양육권은 둘 중 누가 가져야 하는가?'와 같은 문제들이 이 범주에 해당된다. 이런 문제에는 하나의 정답이란 존재하지 않고 사람들마다 보는 관점, 즉 프레임에 따라 서로 다른 의견들이 존재하기 마련이다. 따라서 이런 문제의 해결을 놓고는 서로 자신의 프레임을 상대방에게 주입시키기 위한 치열한 '프레임 전쟁'이 벌어진다.


<명왕성의 운명>

  수,금,지,화,목,토,천,해,명  태양 주위를 도는 9개 행성이다. 그런데 국제천문연맹(IAU International Astronomical Union)은 2006년 8월 24일, 체코 프라하에서 총회를 열고 명왕성을 더이상 행성이 아님을 전 세계에 공포했다. 이름도 명왕성이 아닌 '소행성134340'이라는 이름으로 바뀌었다. 사실 명왕성이 행성의 목록에서 빠졌다고 해서 우리의 일상이 크게 바뀔 것은 없다. 물론 과학책 일부가 바뀔 것이고, 과학 박물관의 그림들도 교체될 것이다.

  그러나 명왕성 퇴출 논쟁이 크게 흔들어 놓은 문제는 따로 있다. 바로 과학의 객관성에 대한 논란이다. IAU는 2006는 총회에서 명왕성을 행성의 지위에서 끌어내리는 안을 놓고 투표를 했고, 그 결과에 기초하여 최종 결정을 내렸다. 객관적 사실이 생명인 과학에서 투표가 웬말인가? 행성이면 행성이지 왜 투표가 필요한 것일까? 행성의 지위를 높고 투표를 했다는 이야기는 행성의 정의라는 것도 과학자들마다의 의견이 다를 수 있다는 점을 보여준다. 나아가 과학이 반드시 잘 정의된 문제만을 다루는 영역도 아니라는 점을 보여주는 좋은 사례라 할 만하다. (애초에 IAU는 행성으로써 명왕성 지위에 대한 논란을 해소하기 위하여 19명의 과학자들로 위원회를 구성했지만, 이들은 2년에 걸친 논쟁에도 불구하고 명쾌한 해결책을 내놓지 못했다. 이에 IAU는 다시 소수의 위원회를 구성했고, 2006년 6월 10일과 7월 1일 파리에서 두 차례 회의를 갖고 명왕성을 행성으로 유지하되, 명왕성과 유사한 3개의 물체를 행성으로 인정하는 수정안을 내놓았다. 새로 추가하려고 한 3개 중 하나는 일명 제나(Xena)로 알려진

'2003UB313 '이라는 물체였다. 그러나 이 안은 즉각 반대에 부딪쳤다. 아이러니 하게도 그 반대의 중심에는, 제나를 발견하여 명왕성의 행성지위에 대한 논쟁을 본격적으로 불러일으킨 칼텍(Cal tech) 의 마이크 브라운(Mike Brown) 교수가 있었다. 브라운 교수는 자신이 발견한 물체가 행성으로 인정되는 영광을 누릴 수도 있었지만, 새로운 수정안에서 내놓은 행성에 대한 정의에 동의하지 않았다. 그는 무엇이 행성인지를 결정하는데 투표가 필요하다면 그것은 결코 과학이 아니라고 주장했다. 더욱이 새로운 수정안에 따르면 앞으로 행성의 수는 예측할 수 없을 정도로 늘어날 것이라고 경고까지 했다. 결국, 반전에 반전을 거듭한 끝에 IAU는 명왕성을 행성에서 제외하고 '전형적인 행성 8개'만을 행성으로 유지하기로 최종 결정하기에 이른다.)

  그러나 행성의 정의가 완전히 해결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어쩌면 앞으로 살면서 '수,금,지,화,목,토,천,해'의 목록에 몇 번의 변화가 생길지도 모른다. 우리 역시 그 어떤 행성이 사라지고 생겨나는지 모른 채 세상을 떠나고, 후손들에게 '측은한 선조'로 기억될지도 모를 일이다.


"내가 외향적인가?" 라고 자문하게 되면 외향적으로 행동했던 증거만 찾으려하고, 내성적으로 행동했던 증거는 잘 찾으려하지 않는다. 반면에 "내가 내성적인가?"라고 물으면 내성적으로 했던 경혐만을 찾고, 외향적으로 행동했던 경험은 잘 찾으려고 하지 않는다. 결국 질문의 방향에 일치하는 쪽으로 자기 판단이 이루어지게 되는 것이다.

  '자기개념'이라는 것도 단 하나로 고정되어 있는게 아니라, 프레임에 따라서 그때그때 달라진다. 그리고 그 프레임은 질문의 방향과 같은 아주 사소한 요인에 의해서 결정되기도 한다.


<심리학자 레비츠키(Lewicki)의 연구>에 따르면 타인을 능력차원으로 평가하는 사람은 자기 자신을 평가할 때도 능력을 가장 중요하게 생각한다. 자기 자신을 정의할 때 능력을 가장 중요한 요소로 보기 때문에 다른 사람을 평가할 때도 동일한 차원에서 평가하게 된다. 반면에 자신을 정의하는데 있어 '따뜻함'을 중요하게 여기는 사람은 타인을 평가할 때도 동일한 차원에서 본다.(......)

  결과적으로 우리가 다른 사람들에게 대해서 말하는 평가나 내용들을 보면, 다른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에 대한 정보를 준다기 보다 우리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를 더 많이 드러낸다. 그러니 자기 주변에 남을 헐뜯는 사람이 많다고 불평하는 사람이 있다면 가까이 하지 않는 것이 좋다. 그 주변 사람이 남을 헐뜯는 사람이어서 두려운 것이 아니라, 그 사람 자신이 남의 허물을 습관적으로 들춰내는 사람일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반면에 세상은 아직 살만한 곳이고 자기 주변에는 좋은 사람이 많다고 말하는 사람은 가까이 해도 좋다. 그 사람은 누구와 있어도 상대방의 장점부터 보기 때문이다. '뭐 눈에는 뭐만 보인다'는 옛말이 기가 막히게 들어 맞는 셈이다. 


"후견지명 (hind sight) 효과" - 사후과잉확신(hindsightbias) "난 처음부터 이렇게 될 줄 알았어!"라고 말하는 것. 현재에만 존재하는 결과론적인 지식이 과거에도 존재했던 것처럼 착각하는 것(영어의 behind + sight) 글자 그대로 결과를 알고 난 후에 '뒤에서 보면' 모든 것이 분명하게 보인다는 것을 의미한다. 다니엘 길버트(Daniel Gilbert) <행복에 걸려 비틀거리다(Stumbling on happiness)>에서 지적했듯이, 현재의 프레임으로 과거를 평가하는 것은 마치 1900년대 초에 안전벨트를 매지 않았다는 이유도 지금에 와서 그 당시 사람들을 체포하는 것과 같다.


에벌레가 나비가 되고 나면, 자신은 처음부터 작은 나비였다고 주장하게 된다. 성숙의 과정이 모두를 거짓말쟁이로 만들어 버리는 것이다. - 조지 베일런트(George Vaillant)


'나는 그러지 않았는데', '우리 땐 안그랬는데'라는 말은 입밖으로 내 뱉어지는 순간 부모와 자식, 상사와 부하 직원 간의 관계를 얼어붙게 만든다. 그러나 실상 이런 말처럼 근거없는 표현도 없다. 자녀에게, 젊은 학생에게, 아랫사람에게 '우리땐 안그랬는데', '저 나이땐 난 그러지 않았는데'라는 말이 튀어나오려고 하면 '정말 그랬을까?'하고 스스로에게 다시 한번 물어보는 지혜가 필요하다.


  우리의 뇌는 미래의 24시간을 정확하게 예측할 수 없다. 우리가 예측할 때는 오늘과 내일 사이의 24시간이 수축현상을 일으켜서 아주 짧게 느껴진다. 미래의 24시간 동안 벌어지게 될 많은 일들이 거의 배제된 채 상상을 하기 때문에, 오늘 아침과 내일 점심이 마치 바로 연이어서 이뤄지는 두 번의 식사처럼 느껴지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같은 음식을 연달아 두 번 먹는 어리석은 실수를 하지 않으려고 한다. 그러나 실제로 일어나게 될 미래의 24시간 동안에 최소한 식사를 두 번이나 더 하게되고, 중간에 간식도 먹을 것이며 술을 마실 수도 있다. 회의도 할 것이며, 친구를 만나기도 하고, 그 외 온갖 예기치 않는 일들을 겪게 될 것이다. 그러나 현재의 예측 속에서 경험되는 매래의 시간 속에는 그런 세부 사항이 생략된 채 현재와 미래가 바로 연달아 일어나는 것처럼 여겨진다.

  이제라도 미래에 무엇을 할 것인지 선택해야 할 때는 항상 가장 좋아하는 것을 골라라. 좋아하는 것을 반복해서 선택했을 때가 이것저것 다양하게 섞어놓은 종합선물세트를 골랐을 때보다 실제 만족도가 더 크다는 점을 기억하는 지혜가 필요하다. 다양성이 인생의 묘미인 것은 사실이지만 다양성을 제대로 즐기기 위해서는 타이밍이 중요하다는 점을 잊지 말자. 


"공돈을 2주간만 은행에다 저축을 해 놓아라." 은행에 예치되어 있는 동안 그 돈은 누가 시키지 않아도 '공돈'이라는 이름에서 '예금'이라는 이름으로 심리적 돈세탁이 이루어질 것이고, 굳이 노력하지 않아도 당신은 그 돈을 자연스럽게 아끼게 될 것이다.


상술이 좋은 판매자들은 어떻게 해서든지 소비자들에게 푼돈 프레임을 유도하려고 노력한다. 신용카드의 할부판매도 같은 원리다. 이에 맞서 지혜로운 소비가가 되기 위해서는 판매자의 푼돈 프레임을 총액프레임으로 피프레임하는 지혜가 필요하다.


  진정으로 지혜로운 부자들은 돈의 절대액수를 중요시하기 때문에 상대적 비교에 따른 푼돈이라는 이름을 거부한다. 그래서 그들은 수백억을 가졌음에도 100원짜리 하나도 소중히 여기지만, 상대적 가치프레임에 빠져 있는 사람들은 콩나물값을 깎을 때는 100원을 귀하게 여기다가도 10만원짜기 물건을 살 때는 100원을 하찮게 여겨 깎으려고도 하지 않고, 혹시나 100원을 깎아준다고 하면 오히려 기분나빠 한다.


키를 쟀을 때 174센티미터인 경우네는 크다고 하고, 5.7피트인 경우에는 작다고 해서는 안되듯이, 원화로 구입할 때, '1만원짜리'물건은 비싸다고 생각하면서 달러로 구입할 때 '10달러'는 싸다고 생각해서는 안된다.


돈에 붙이는 '이름 프레임'

돈에 붙여지는 이름에 따라 돈을 다르게 쓰게 된다는 이 단순한 원리 하나만 잊지 않고 산다면 비록 큰 부자는 못되더라도 지혜로운 부자는 되고도 남을 것이다. 경제적 합리성의 기본은 돈에 이름을 붙이지 않는데서부터 출발한다. '공돈'이라는 이름은 없다는 것을 기억하라. 어차피 없었던 돈, 혹은 어차피 쓸려고 했던 돈이라는 이름도 없다. 이 돈 있어도 살고 없어도 산다는 표현도 쓰지 않는 것이 좋다. 이것만 충실히 지켜도 당신은 경제적으로 지혜로운 사람이 될 수 있다.


'손실혐오(Loss aversion)' 심리학 용어

동일한 양의 이득으로 오는 만족보다는, 동일한 양의 손실이 주는 심리적 충격이 더 크기 때문. 카네만 교수의 연구에 따르면 손실은 이득보다 2.5배 정도 더 큰 영향력을 갖는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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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번의 문구를 사용했을 때 대부분의 사람들은 현금구입을 선호했다.


지혜로운 선택을 하기 위해서는 현재 상태로 주어진 대한을 '중립적인 대안'으로 리프레임 해 볼 필요가 있다. 단 한 번이라도 현재 사용하고 있는 물건이나 서비스, 심지어 기존의 직업까지도 처음 접하는 중립적인 대안으로 리프레임 해서 본다면 아마도 많은 선택들이 달라질 것이다.


위대한 '반복 프레임'을 연마하라.


"습관은 그 어떤 일도 할 수 있게 만들어준다." - 도스토예프스키 - 


만시간 법칙, 십년 법칙,

우리가 알고 있는 천재들 중 대부분은 타고난 천재성이 아니라 우리의 상상을 뛰어넘는 집중과 반복의 산물임을 기억하라.


2013. 5. 19 일요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