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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81. 자연, 랄프 왈도 에머슨, 은행나무, 2014.

햇살처럼-이명우 2020. 5. 15. 15:56

581. 자연, 랄프 왈도 에머슨, 은행나무, 2014.

 

차례

  자연

  자립

  보상

  경험

  운명

 

  사실 자연을 볼 수 있는 어른들은 매우 적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태양을 보지 않는다. 기껏해야 그들은 극히 피상적인 시각을 갖고 있다. 태양은 단지 어른의 눈을 비출 뿐이지만, 아이의 경우 눈과 마음 속까지 비춘다. 자연을 사랑하는 사람은 내부와 외부의 감각들이 진실로 서로 순응되어 있는 사람들이다.

 

  "바람과 파도는 언제나 가장 유능한 항해사의 편이다." - 에드워드 기번 -

 

  인간은 유추하는 자이고, 모든 대상에 있어서 관계를 연구하는 법이다. 그는 존재들의 중심에 자리하고 있고, 한 줄기 관계의 빛이 다른 존재들로부터 그에게 전해진다. 이러한 대상들 없이 인간이 이해될 수 없고 또한 이러한 대상들도 인간 없이는 이해될 수 없다.

  

  중심적 통일성은 행동에서 한층 더 두드러진다. 말은 무한한 마음의 유한한 기관이다. 말은 진리 속에 내재한 모든 차원을 포괄하지 못한다. 말은 진리를 부수고 절단하여 빈약하게 만든다. 행동은 생각의 완성이자 공표이다. 바른 행동은 눈을 가득 채우고 모든 자연과 관계를 맺는 것 같다. '현명한 사람은 한 가지 일을 하면서 모든 일을 한다. 말하자면 그가 바르게 행한 한 가지 일에서, 그는 바르게 행해진 모든 일의 유사성을 본다.'

 

  자연을 바라볼 때 우리가 보는 폐허나 공허함은 우리 자신의 눈 속에 있다. 시간의 축은 만물의 축과 일치하지 않는다. 그래서 만물은 투명하지 않고 불투명하게 보인다. 세계가 통일성을 잃고 분열되어 쓰레기 더미로 쌓여 있는 이유는 인간이 그 자신과 분열되었기 때문이다. 인간은 정신의 모든 요구를 만족 시킬 때 비로소 자연주의가 될 수 있다. 사랑은 지각과 마찬가지로 정신의 요구이다. 실로 어느 한 쪽도 다른 쪽이 없이는 완전해질 수 없다.

 

  이제 세계가 그대를 위해 존재하고 있음을 알라. 현상 세계가 완전한 것은 그대를 위해서이다. 우리가 무엇인지는 우리가 어느 정도 볼 수 있느냐에 달려 있다. 아담이 가졌던 모든 것을, 카이사르가 할 수 있었던 모든 것을 그대도 가졌으며 또한 할 수 있다. 아담은 그의 집을 하늘과 땅이라 불렀다. 카이사르는 그의 집을 로마라 불렀다. 그대는 아마도 그대의 집을 구둣방, 1백 에이커의 경작지, 또는 학자의 다락방이라 부를 것이다. 비록 아름다운 이름이 없을지라도 그대의 영토는 테투리면 테두리, 지점이면 지점, 모두가 아담이나 카이사르의 영토 못지않게 위대하다. 그러므로 그대 자신의 세계를 건설하라. 그대가 가능한 한 빨리 그대의 삶을 마음 속에 순수한 이데아에 순응시키면, 그대의 세계는 그 거대한 부분을 드러낼 것이다.

 

  그대의 내면에 깃든 신념을 말하라. 그러면 그것은 보편적 의미가 될 것이다.

 

  누구나 교육과정 속에서 다음과 같은 사실을 확신하는 때가 있다. 질투가 무지이고, 모방은 자살이며, 좋건 나쁘건 스스로를 자신의 운명으로 받아들여야 하고, 비록 광할한 우주가 유익한 것으로 가득찼을지라도 자신에게 주어진 그 작은 땅덩어리를 경작하는 노고가 없다면 양식이 되는 곡식 한 톨도 자신에게 주어질 수 없다는 사실 말이다.

 

  자연은 아이들, 갓난 아기들, 심지어 짐승들의 얼굴과 행동 속에서 얼마나 훌륭한 계시를 주고 있는가! 이들은 분열되고 거역하는 마음, 우리의 계산법으로는 우리의 목적에 반대되는 힘과 수단을 따지는 데서 생기는 감정의 불신을 갖고 있지 않다. 그들의 마음은 있는 그대로이기 때문에 그들의 눈은 아직 정복당한 일이 없으며, 그들의 얼굴을 들여다보고 있노라면 우리는 당혹스러워 진다. 유아는 누구에게도 순응하지 않는다. 그래서 갓난 아이 한 명이 보통 네 다섯명의 어른들을 자신에게 재잘거리며 재롱떨게 만든다. 신은 소년과 청년과 장년도 마찬가지로 그들만의 개성과 매력으로 무장시키고 부드러움과 선망의 대상이 되도록 만들어 그들이 스스로를 고수하는 한 그들의 주장도 무시되지 않게끔 했다. 젊은이가 그대와 내게 말을 할 수 없다고 해서 그가 힘이 없다고 생각하지 마라.

 

  내 본성의 법칙 이외에 어떠한 법칙도 내게 신성하지 않다. 선과 악은 이것이나 저것으로 매우 쉽게 변할 수 있는 이름일 뿐이다. 유일하게 옳은 것은 나의 본성에 따르는 것이고, 유일하게 그릇된 것은 나의 본성에 반하는 것이다. 인간은 모두 반대를 무릅쓰고 자신 이외의 모든 것이 허울뿐이고, 덧없는 것처럼 행동해야 한다. 우리가 얼마나 쉽게 배지와 호칭에, 보다 큰 단체와 죽은 제도들에 굴복하는지를 생각해보면 나는 부끄러워진다. 도덕적이고 격조있는 말을 하는 모든 사람들은 올바른 사람보다 내게 더 큰 감동을 주고 마음을 움직인다.

 

  어리석은 일관성은 옹졸한 정치인들과 철학자들과 신학자들이 숭배하는 범부들의 도깨비 장난에 불과하다. 위대한 영혼은 일관성과 전혀 상관없다. 그것은 그가 벽에 생기는 자신의 그림자를 걱정하는 것과 같다. 그대가 현재 생각하는 것을 확고한 언어로 말하라. 비록 오늘 그대가 말한 모든 것과 모순될지라도.

  내일은 내일 생각하는 것을 확고한 언어로 다시 말하라. 아 그러면 그대는 분명히 오해를 받을 것이다. 오해받는 것이 그렇게 나쁜 것인가? 피타고라스도 오해받았고, 예수, 루터, 코페르니쿠스, 갈릴레이, 뉴튼 등 육체를 가진 순수하고 현명한 정신은 모두 오해받았다. 위대한 것은 오해 받는 법이다.

 

  더 이상 머리 숙이고 사과하지 말자. 위대한 사람이 내 집에 식사하러 온다해도, 나는 그를 즐겁게 해주려고 애쓰지 않는다. 나는 그가 나를 즐겁게 해주기를 희망한다. 나는 여기에서 인간성을 지키려고 한다. 비록 친절한 인간성이 되도록 하겠지만, 나는 인간성이 진실되게 하고 싶다.

 

  내 창문 밑에 피어난 저 장미들은 이전의 장미들이나 보다 나은 장미들을 전혀 언급하지 않는다. 그것들은 다만 현재의 모습으로 존재할 뿐이다. 그것들은 신과 함께 오늘 존재한다. 그것들에는 시간이 존재하지 않는다. 단지 장미가 있을 뿐이다. 잎눈이 트기 전에, 그 온 생명이 활동한다. 완전히 만개한 꽃에도 그 이상의 생명이 없고, 잎이 없는 뿌리에도 그 이하의 생명이 없다. 모든 순간에 한결같은 장미의 본성은 만족하고, 장미는 본성을 만족시키고 있다. 그러나 인간은 미래로 미루고 과거를 기억할 뿐이다. 인간은 현재를 살지 않고 눈을 돌려 과거를 탄식하거나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풍요로움에 관심을 두지 못한 채 미래를 내다보려고 발끝으로 서 있다. 시간을 초월하여 자연과 더불어 현재를 살지 못한다면 인간은 결코 행복하거나 굳세게 살 수 없다.

 

  영혼은 결코 여행자가 아니다. 현명한 사람은 집에 머물며, 필요와 의무 때문에 집에서 나와 외국에 가게 된 경우에도 그는 여전히 집에 있는 것과 같고, 얼굴 표정을 통해 그가 지혜와 덕의 사절로써 주유하며 침입자나 시종이 아닌 군주로서 도시와 사람들을 방문하고 있다는 것을 사람들이 깨닫게 만들것이다.

 

  여행은 바보의 낙원이다. 첫 여행에서 우리는 방문하는 곳이 그리 대수롭지 않다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집에서 나는 나폴리나 로마에서 아름다움에 도취되어 나의 슬픔을 잊을 수 있늘 것이라고 꿈을 꾼다. 나는 여행가방을 싸고, 친구들과 작별의 포옹을 나눈 후 배를 타고 출항하여, 마침내 나폴리에서 정신을 차리게 된다. 내 곁에는 내가 도피해온 엄연한 사실, 즉 무자비하고 변함없는 자아가 있는 것이다. 나는 바티칸이나 여러 궁정들을 찾는다. 나는 관광명승지와 그 연상들에 도취된 척 하지만 실은 도취되지 않는다. 나의 거성(巨星)은 내가 어디를 가든 나와 함께 간다.

 

  우리의 장점은 약점으로부터 자란다. 은밀한 힘으로 무장한 분개는 우리가 아픈 자극을 받으며 찔리고 심한 공격을 받고 나서야 비로소 깨어난다. 위대한 인간은 언제나 자진해서 소인이 되고자 하는 법이다. 편한 이익의 방석에 앉아있는 사이에 그는 잠이 들게 된다. 압박을 받으며 고통을 당하고 패배를 겪을 때 그는 뭔가를 배울 기회를 갖게 된다. 그는 지혜를 얻게되고 인격을 완성한다. 그는 사실을 파악하고, 자신의 무지를 깨달으며, 자만의 어리석음으로부터 벗어나고, 중용과 진정한 기술을 얻게 된다. 현명한 자는 자신을 적에게 내던지는 법이다. 약점을 발견하는 것은 적의 이익이라기 보다는 자신의 이익이다. 상처는 아물어 죽은 피부처럼 그에게서 떨어진다. 적들이 승전의 개선식을 올릴 때, 보라! 그는 상처받지 않는 자가 되어있다. 비난이 칭찬보다 안전하다. 나는 신문에서 변호되는 것을 싫어한다. 나에 대해서 하는 모든 말들이 나에게 불리할 때에, 나는 신문에서 변호되는 것을 싫어한다. 나에 대해서 하는 모든 말들이 나에게 불리할 때에, 나는 적 앞에 아무런 보호책도 없이 내던져진 사람과 같은 느낌이 든다. 일반적으로, 우리가 굴복하지 않는 한 모든 악은 은혜로운 것이 된다. 샌드위치 섬의 주민이 자신이 죽인 적의 힘과 용맹함이 자신에게 옮겨온다고 믿듯이, 우리는 우리가 거부하는 유혹으로부터 힘을 얻는다.

 

  모든 집의 지붕은 보기에는 다 괜찮아 보인다. 그러나 그 지붕을 들어올려보라. 그 아래에서 우리는, 비극과 한탄하는 아낙네와 눈을 부라리는 남편과 홍수처럼 흘러 넘치는 망각의 강을 보게 된다. 남자들은 옛것이 아주 나쁜 것인양 '뭐 새로운 것이 없나?' 하고 늘 묻는다. 과연 사회에서 우리가 소중하게 생각하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중요하게 여기는 행동은 얼마나 될까? 의견이나 견해는? 준비작업과 일상사, 과거를 회상하는 일에 너무나 많은 시간을 허비하기 때문에 우리 각자가 저마다 타고난 재능의 정수를 펼치는데 주어지는 시간은 불과 서너시간으로 줄어들고 만다. 

 

  우리가 아무리 세게 움켜쥐더라도 손가락 사이로 미끄러져 빠져나가버리는 만물의 덧없음과 불안정성이 우리의 조건 중에서 가장 아름답지 못한 부분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자연은 관찰되는 것을 좋아하지 않으며, 우리가 자연의 어릿광대이자 놀이친구가 되는 걸 좋아한다.

 

  몽테뉴, 셰익스피어, 플루타르코스, 플로티누스, 베이컨, 괴테, 베티나, 폰 아르님

 

  삶은 지적이거나 비평적인 것이 아니라 억센 현실이다. 삶의 주된 행복은 스스로 찾아낸 것을 의심없이 즐길 수 있는 잘 융화된 사람들을 위한 것이다. 자연은 엿보는 사람들을 싫어한다. 그래서 우리 어머니들은 "얘들아, 밥이나 먹으렴. 더 이상 얘기하지 말고"라고 말하면서 자연의 뜻을 바로 말하는 것이다. 시간을 채우는 것, 그것이 행복이다. 말하자면 현재의 시간을 채우고, 후회하거나 찬성할 틈을 남기지 않는 것이다.

 

  인간의 삶은 두 가지 요소, 즉 힘과 형식으로 이루어진다. 그러므로 우리가 삶을 달콤하고 건강하게 만들고자 한다면, 이 둘 사이의 균형이 변함없이 유지되어야 한다. 둘 중 어느 한 요소가 과도해지면 그것이 부족한 것 만큼이나 해악을 끼친다. 모든 것은 극단으로 나아가려는 경향이 있다. 좋은 성질의 것도 나쁜 요소와 섞이지 않으면 해로워진다.

 

  형용불가능한 원인을 두고 뛰어난 천재들은 명확한 상징으로, 이를테면 탈레스는 물로, 아낙시메네스는 공기로, 아낙사고라스는 사상으로, 조로아스터는 불로, 예수와 현대인들은 사랑으로 나타내려고 시도해 왔다. 그리하여 각자의 은유는 한 민족의 종교가 되었다. 

 

  모든 영혼은 그 자신의 집을 짓지만, 그 후에는 그 집이 그 영혼을 제한한다.

 

  자연의 책자는 운명의 책자이다. 자연은 거대한 책장들, 말하자면 한 잎 한 잎 결코 되돌아오지 않는 책장을 넘기고 있다.

 

  관계의 망은 서식지와 동면에서 찾아볼 수 있다. 동면을 관찰하다보면, 어떤 동물들이 겨울에 움직임이 없는 반면 다른 동물들은 여름에 움직이지 않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동면은 잘못된 명칭이다. '긴 잠'은 한기의 결과가 아니며, 그 동물에게 적당한 음식이 공급되느냐에 의해 조절된다. 과일과 같은 먹이가 제 때에 없으면 동물의 움직임이 없어지고, 음식이 준비되어 있으면 그 활동력을 되찾는다.

  시력은 빛 속에서 존재하고, 청력은 귓속에, 발은 땅 위에, 지느러미는 물속에, 날개는 하늘 속에, 그리고 각자의 피조물은 상호 적합성을 가지고 그것이 의도된 장소에 존재한다. 모든 지역은 그 자체의 동물상(動物狀)을 갖는다.

 

  서양은 외면적으로는 현실지향적이며 물질주의이고, 합리적인 면모를 보이지만, 내면적으로는 내세 지향적이다. 반면 동양은 외면적으로는 이상 지향적이며, 정신주의적이고 직관적으로 보이지만, 내면적으로는 현세지향적이다. 따라서 서양의 기독교는 내세에서 구원을 구하지만, 동양의 유불선은 상대적으로 현세에서 구원을 얻고자 한다. 보상원리가 두 세계에 작용하면서 두 세계 모두 전체적인 균형을 어느정도 유지하고 있는 셈이다.

 

  에머슨은 지나침 못지않게 부족함도 경계한다. 그는 무엇보다 실제적 균형을 중시하고 있다. 이 과정에서 통찰력과 애정, 운명과 생명력, 다양성과 통일성 등의 삶의 양극적 요소들을 어떻게 배합할 것인가에 대한 실제적인 문제가 남는다. 에머슨은 스케이트에 대한 비유로 이 문제를 설명하고 있다. "우리는 삶의 표면 가운데에 살고 있으며, 삶의 진정한 기술은 그 위에서 스케이트를 잘 타는 것이다." 우리가 미끄러지기 쉬운 빙판 위에서 좌우의 균형을 잘 잡고 삶의 기술로써 "스케이트 타는 법을 터득한다면" 삶의 양극적 요소들로 인한 모순이 역설적으로 우리에게 "우아하고 달콤하며 시적인 동작"을 줄 수 있다. 따라서 인간에게 주어진 모든 시련과 자연의 한계는 오히려 '그가 타는 말'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2017.1.1. 아침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