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0. 산업혁명사 上, 뽈망뚜, 창작과 비평사, 1992
산업안전보건법의 기원을 쫒다, 산업혁명史에 이르게 되었다.
차례
서론
1. 근대적 공장제도
2. 정의의 필요와 곤란
3. 공장제도 이전의 산업자본주의
4. 매뉴팩처 - 노동력의 집중과 분업
5. 교환과 분업의 상관적 발달
제1부 선행적 변화
제1장 구공업과 그 발전
1. 양모공업 - 구공업의 전형
2. 양모공업의 확산
3. 양모공업의 조직
4. 상업자본의 역할
5. 노동계급의 상태
6. 노동계급의 상태
7. 보수적 경향 - 경제입법
8. 구공업의 완만한 변모
제2장 상업의 비약적 발전
1. 교환과 생산의 상호의존
2. 영국의 상업사 개관
3. 대외 무역의 발달
4. 공업에 미치는 수출의 영향
5. 국내 상업의 조직
6. 교통수단
7. 연안무역의 발달로 인해 지연된 운하건설
8. 상업발전과 결과들
제3장 토지소유의 재편성
1. 요먼계급의 쇠퇴와 소멸
2. 18세기 엔클로저 법들
3. 개방경지 제도
4. 공동지와 공동권
5. 엔클로저의 진전
6. 농업개혁
7. 개방경지는 농업개량의 장애가 되다.
8. 사회, 경제적 결과들
9. 도시를 향한 이주가 시작되다.
제2부 발명과 공장
제1장 섬유공업에 있어서 기계의 출현
1. 기계 사용과 기계제 공업의 구별
2. 잉글랜드 면공업과 그 출발
3. 기계사용 이전의 면공업
4. 최초의 방적기
5. 하그리브즈의 제니 방적기의 발명
제2장 공장
1. 아크라이트, 그 출발
2. 아크라이트의 성공
3. 1785년의 재판
4. 크롬프턴의 물방적기
5. 방적과 방직의 균형을 깬 방적기계 도입
6. 산업적 변모의 단계들
7. 물질적 결과 - 생산의 증가와 주기적 공황
8. 경제적 자유
9. 양모공업과 기계
근대적 공장제도는 18세기의 마지막 30년 동안에 잉글랜드에서 탄생하였다. Anold Toynbee는 처음부터 그 영향은 매우 빨리 감지되었고, 너무도 중요한 결과를 빚어냈기 때문에, 그것은 적절하게도 하나으 혁명에 비유되었다.
산업혁명은 여러 원인(遠因)에서 발생했으며 산업혁명의 발달과정은 1세기 이상이 지난 뒤에도 여전히 미완성으로 남아있다. 공장제도 특유의 특징은 단번에 드러나지는 않았다.
매뉴팩쳐(manufacturer) manufacture 제조업 ~er 제조업자. 칼마르크스 논문에서 사용했다. '매뉴팩쳐' 자체는 노동과 자본의 분이를 의미한다. 제조업자(manufacturer)는 도구를 보관하고 직접 감독하는 작업장들을 조직한 반면에 장인은 오직 노동만을 그에게 팔고 그 댓가로 임금을 받았다. 매뉴팩처의 주요한 원칙과 존재이유 전체의 분업이다.
상업자본의 역할
가내공업은 그 생산이 소비가 흡수할 수 있는 양보다 커지자마자 오직 하나의 조건 위에서 존속할 수 밖에 없게 된다. 즉 자기의 재화를 스스로 처분할 수 없는 제조업자는 재화를 사서 국내시장이나 해외시장에 다시 파는 일을 맡는 상인과 교섭을 해야만 한다. 이 상인, 다시 말하면 이 없어서는 안되는 동맹자는 공업자체의 운명을 그의 손에 움켜쥔다. 상인과 함께 하나의 새로운 요소가 활동을 시작하는데, 이것은 즉각 생산에 영향을 미친다. 상인 직물업자(merchanr clothier) 는 자본가이다. 흔히 그는 한 쪽의 소생산자, 다른 쪽의 소매인 사이에서 중개자의 역할만 한다. 그러므로 그의 자본은 아직도 순전히 상업적인 목적에만 사용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처음부터, 제조업의 덜 중요한 세부적인 공정에 대한 경비를 상인에게 부담시키는 것이 관례가 되어 있었다. 방직공이 양도한 직물은 보통 마무리 손질이나 염색이 되어있지 않은 상태였다. 그래서 상인은 실제로 판매에 앞서 마무리 공정을 해야하는 책임을 지고 있었다. 상인은 이 일을 하기 위해서 노동자들을 고용해야만 했고, 이럭저럭 고용주가 되었던 것이다. 이것은 상업자본이 산업자본으로 점진적으로 진화(轉化)하는 제1단계였다.
생산제도의 완전한 변혁을 가져온 위대한 발명들의 시기의 전야인 1765년 싯점에도 섬유공업의 대부분의 분야에서 여전히 사용되던 얼레빗 대신에 금속의 살이 달린 얼레빗을 사용하는 것은 금지되었고, 이를 위반할 경우 벌금이 부과되었다.
생산의 발전과 상업의 발달은 너무나 밀접하게 결부되어 있고 여러가지 방식으로 상호영향을 미치기 때문에 어느 편에서 발달이 먼저 시작되었는가를 발견할 수 있기가 실로 어렵다. 때로는 공업의 발전이 교역이 새로운 출구를 발견 할 수 있도록 함으로써 상업관계를 확대하고 증대시킨다. 반면에 어떤 때는 시장의 확대에 의해 창출된 새로운 수요가 공업적 기업을 자극한다. 현대에는 전자의 경우가 더 흔하다. 기술발전이라는 내면적 힘에 의해 추동되는 근대적 공업은 그 발전과정에서 상업과 신용을 동반하였으며, 상업과 신용은 근대적 공업을 위해 세계정복에 나서게 된다. 더구나 경제생활의 제 현상의 근원이 생산 자체에 있다고 여겨질 때, 생산이 그 현상들을 지배하는 것은 당연한 것으로 보일 뿐이다.
1688년의 명예혁명은 정치세력과 종교세력에 의해 실현되었다. 정치집단과 법인과 프로테스탄트 국민 전체이 노력인 이 혁명이 어느 한 사회계급의 이기적인 동기에서 비롯되었다고는 볼 수 없다.
자기를 왕으로 선포할 의회의 개회를 기다리는 동안에 오렌지 공(Prince of Orenge, 1650~1702 영국과 아일랜드의 왕[1689~1702])은 임시국회를 소집하여 그의 권력을 분담시켰고, 그 때 런던의 시장과 참사회원들(Aldermen)은 옛 하원 의원들의 옆자리에 앉았다. 마지막으로 당면한 필요에 대처하기 위해, 특히 군대에 봉급을 주기 위해 씨티(The city, 런던시 중심부 약 1평방마일의 지역으로 the Lord Mayor와 시의회가 지배하는 상업, 금융의 중심지, 행정구역으로서의 대 런던과는 구별됨) 는 국고에 20만 파운드를 대여했다. 그것은 새로운 왕정이 상인, 금융업자 계급과 제휴했다는 증거였다. 그 순간부터 그 거대한 운동이 시작되었으며, 이 운동은 150년 뒤 정권을 장악하는 중산계급의 명백한 승리로 끝났다. 그들은 자신이 취한 태도의 이익을 거의 당장에 거두어 들였다. 명예혁명 직후에 엄청난 중요성을 갖는 두 가지 경제적 사건이 일어났다. 잉글랜드 은행(Bank of England)의 설립과 동인도 히사의 최종적 규약의 성안이 그것이었다.
런던의 씨티에, 즉 오늘날 유럽에서 가장 유력한 금융단체들이 함께 모여있으며 자본이 지구의 끝으로부터 모여드는 그 작은 지역에, 17세기 중엽까지는 단 하나의 금융업소도 없었다. 상인들이 롬바드가(현재 금융의 중심지)의 금 세공인(goldsmith)들에게 자본을 처음 위탁하기 시작한 것은 내란기간(1642~49)이었다. 단순한 보관자였던 이 사람들은 곧 금융가를 형성했으며 그들의 어음은 씨티의통상적 거래에서 현금의 지위를 차지했다. 신용이 보편화되자 공증은 오랫동안 보다 발달된 금융제도를 갖고 있던 다른 나라의 사례 쪽으로 관심을 돌렸다. 잉글랜드가 국립은행을 구상한 것은 이탈리아와 네덜란드 덕분이었다. 잉글랜드 은행 덕분에 런던은 암스테르담에 필적하는 무역과 기업의 중심지가 될 수 있었다.
잉글랜드 은행이 설립 당시에, 이미 1백년 가까운 역사를 갖고 있으면서 전례없는 번영의 시기가 막 지난 동인도회사는 와해 직전인 듯 보였다.
1708년, 아우랑제브(AurangZeb, 무갈제국의 황제[1658~1707])가 죽은 뒤 무갈제국이 붕괴된 바로 그 해, 거대한 동인도회사가 형성되었다. 이 회사는 클라이브(Robert Clive, 1725~74, 이 회사의 말단 사무원에서 출발하여 입신한 장군, 정치가, 플라시에서 인도와의 전쟁에서 승리하려 지배권을 확립), 워런 헤이스팅즈(Warren Hastings, 1732~1818, 최초의 인도 총독), 웰즐리(Richard Colley Wellesley, 1760~1842, 정치가, 인도 총독) 와 더불어 힌두스탄(인도반도의 힌두교 지대)를 정복했으며 한 세가 반 동안에 그 광대한 지역을 착취하고 통치했다.
인도와의 무역은 가장 다양한 품목들을 포함했고, 온갖 형태를 취했으며, 점점 잉글랜드 부의 필수적인 요인의 하나가 되었다.
잉글랜드 은행과 동인도회사는 국내와 국외에서 두 개의 축이었고, 잉글랜드의 정책은 이 축 위에서 회전했다. 그리고 이제 이 정책은 엘리자베스 치세와 크롬웰의 정부 아래서 예견했던 바다와 해상무역의 정복을 마침내 지향할 수 있었다.
18세기 영국정치의 승리는 동시에 중상주의의 승리였다. 제품을 수출하고 원료를 수입하는데 유리한 식민지 무역을 무역의 전형으로 보는 것이 중상주의였다.
버밍검의 제조업자들은 발명에 재능을 보였지만 기업경영에 있어서는 그만큼 능력을 보이지는 못했다. 그가 작은 작업장에서 가장 간단한 도구를 가지고 단추, 구두죄는 쇠붙이, 담배갑 또는 위조주화까지 ('버밍검 제품'이라는 말은 오랫동안 의심스러운 품질을 지닌 상품의 대명사였다.) "자신의 용철로(鎔鐵爐)의 따뜻함ㅇ이 미치는 곳 안에 머물면서였던 것이다. 그러나 이런 유형의 생산자와 나란히 적극적인 상인계급이 급속히 등장했다. 영국의 방방곡곡을 여행하고 유럽대륙 및 아메리카와 부단히 접촉하고 있던 이들은 제조업자들이 생산을 늘리고 제조방법을 개선하도록 계속 강요했다. 나중에 그들은 스스로 생산을 감독했다. 아마 버밍검 공업의 위대성을 위해 가장 많은 일을 한 쏘호의 지휘자로서의 천재적 능력에 못지않게 상업적 재능 덕분이었다. 그는 시장의 필요와 가능성을 잘 알고 있던 대담하고 영리한 상인으로서 와트(James Watt, 1736~1819, 슼틀랜드의 기사, 증기기관의 완성) 의 발명에 재정지원을 하고 그것을 실용화했던 사람이다.
수출은 기존의 공업을 자극하고, 수입은 새로운 공업을 출현시킨다.
1760년~74년에 의회는 도로건설 및 유지에 관한 452건의 조례를 통과시켰다.
이 당시에 기사(技師, engineer)의 1세대가 나타났는데, 이들은 자신도 의식하지 못한 사이에 평범한 사업을 계획하고 수행한 사람들로서 잉글랜드 국민의 실용적 경험주의(Practical empiricism)의 체현자이다. 모두가 똑같이 농촌적 특징을 갖고 있던 이 신기한 인간집단 사이에서 한 사람이 두드러지게 나타나는데, 그는 네어즈보로(Knaresborough)의 맹인인 존 메트카프(John Metcalf)였다. 이 비범한 인물은 모든 사람이 그가 장님이라는 사실을 거의 잊게 할 정도로 총명하고 대담했다. 1745년 그는 자기 주의 의용군에 가담하여 컴플랜드 공작 휘하에서 스코틀랜드 전투에 참여했다. 그는 처음에는 말장수, 다음에는 운송업자로서 여러 해 동안 험버강과 머지강 사이의 지방을 샅샅이 돌아다녔다. 이 지역은 교통문제가 극도로 긴급했다. 페나인 산맥의 높은 늪지대를 가로 지르는 도로들은 이 분수령의 양측에서 날이갈수록 늘어나는 교통량을 감당하기에 충분하지 못했다. 존 매트카프는 도로건설자가 되었다.
그 지역의 많은 도로는 1760~90년에 존 매트카프가 설계하고, 개량하고 건설한 도로였으며, 이 도로 가운데 일부는 공장제도의 탄생 직전에 일부는 직후에 완성되었다. 이리하여 공장제도는 그 확대와 발전을 위해 이미 준비된 지역에서 성장해갔다.
요먼계급(Yeomanry, 자영농민계급)
엔클로저(enclosure)는 토지제도의 변화를 추구하는데 이용된 방법이다. 이제까지 울타리를 치지 않았던 개방경지와 공동지에 울을 쳐서 폐쇄된 소유지를 만든다는 것은 중요한 의미를 띤다. 분산된 지조(地條)들을 한 데 묶고 공동 경작지를 분할한 다음 이것을 연속된 생울타리(hedges)로 둘러싸인 한 덩어리의 소유지로 만드는 것이 엔클로저였다. 생울타리는 토지의 자율성 보장이며 동시에 그 표상이었다.
"궁핍과 일자리 부족때문에 무리를 지어 대거 공업도시들로 몰려든다. 공업도시에서 그들은 직기와 노(爐)에서 일하게 되는데, 그 작업의 성격 자체가 그들의 힘을 허비시키고, 결과적으로 그들의 후손을 쇠약하게 만든다."
공업에서처럼 농업에서도 자본가의 주도권은 자기 본위적이면서도 공동체에 유익한 것임이 드러났다. 왜냐하면 그 주도권은 노동자들이 여전히 보호를 구하고 있던 해로운 일상적 절차와 낡은 제도들을 동시에 없애버렸기 때문이다. 기업이 성공하기 위한 조건은 비용의 감축과 이윤의 증대다. 엔클로저는 노동의 감소와 생산의 증가라는 결과를 빚었다.
섬유공업에서 주된 두 공정은 방적과 방직이다.
아크라이트, 경제사에서 수많은 사건과 인물들 중에서 처음부터 빛나던 몇몇 가운데 한 명이다. 전해오는 이야기에 따르면 그는 스스로의 노력과 발명에 의해 부유해진 위대한 제조업자일 뿐더러 근대적 공장제도의 진정한 창시자라고 이야기 된다.
1732년 12월 23일 리차드 아크라이트 출생. 젊었을 때 이발사와 가발제조공을 겸하는 사람의 도제로 일했다.
2019.8.5. 휴가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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