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60. 내가 틀릴 수도 있습니다(I May Be Wrong, 숲속의 현자가 전하는 마지막 인생수업), 비욘 나티코 린데블라드, 다산초당, 2022.
비욘 나티코 린데블라드
1961년 스웨덴 출생, 2022년 루게릭 병 악화로 1월에 사망.
"17년 동안 승려로 살면서 배운 가장 중요한 가르침은 무엇입니까?"
"17년 동안 깨달음을 얻고자 수행에 매진한 결과,
머리속에 떠오른 생각을 다 믿지는 않게 되었습니다. 그게 제가 얻은 초능력입니다."
프롤로그 가장 중요한 것 단 한 가지
알아차리다
가만히 있어도 불편한 삶
과거라는 목줄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
사원에 첫 발을 내딛다
떠오르는 생각을 다 믿지 않는다
엄마, 나 숲속의 승려가 되려고요
지혜가 자라나는 사람, 나티코
순간의 지성
괴짜들의 공동체
선택하지 않는 훈련
곰돌이 푸의 지혜
마법의 주문
아홉번의 실패
나를 괴롭히는 그 사람은
어색한 은자의 행복
닫힌 주먹, 열린 손바닥
할 짓이 없어서 빌어먹나
지적이 일어날 여지
한 가지는 확실하다
무언가가 깨어나다
잃을 것은 너무나 많지만
전직 승려의 수치
반지 안의 비밀
모든 것은 너에게서 시작한다
열린 문으로 들어가다
인생의 의미는 당신의 선물을 찾아 나누는 것
믿음이 보여주는 자리로
두려워하지 않아도 돼
죽음이 찾아오는 모습
다 빼앗길 것이다
네가 세상에서 더 보고싶은 것
떠날 때를 아는 이별
몹시 거슬리는 한 마디
원래 그랬던 것이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
에필로그 두려움도 망설임도 없이
내면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였다고 해서 무슨 엄청난 각성을 했다거나 특별한 정신상태에 도달했다는 뜻은 아닙니다. 다만, 정신없이 휘몰아치는 생각의 소용돌이에서 잠시 벗어났지요. 그것만으로 놀라운 해방감을 느꼈습니다. 생각이 온전히 사라지진 않았지만 더는 그 속에 매몰되진 않게 된 것입니다. 마치 한 발짝 물러나 제 마음을 지켜볼 수 있게 된 것 같았지요. 그러자 내가 생각하는 것이지, 내가 곧 생각과 같은 것은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장기간 산행을 해본적이 있다면 아마 비슷한 경험을 해보았을 겁니다. 복잡하던 삶이 나날이 단순해지지요. 결국엔 날씨와 몸, 음식, 음료, 휴식으로 압축이 됩니다.
자기 마음을 어떻게 다루어야할지도 모르는, 번민으로 가득한 어린 중생, 하지만 남들이 보기에 사소한 일에도 당사자는 죽을듯이 고통스러울 수 있다는 것도 인생의 진실이다.
우리 머리속에서 전혀 검열되지 않은 채 불쑥불쑥 떠오르는 생각을 직면하면 당황해서 겁을 먹거나 실망하기 쉽습니다. 남들이 우리 마음을 읽을 수 없어서 그나마 다행이지요. 아마 그들도 우리와 다르지 않다는 사실에 안심할 테지요. 우리의 머리 속에 떠오르는 것들은 생각일 뿐, 진실은 아니라는 사실을 이해하기만 하면 됩니다. 아울러 내면에서 벌어지는 생각의 곡예에 주목할 줄 아는 것은 유용한 기술입니다. 그래야 필요할 때 그런 생각을 한 발짝 떨어져서 바라볼 수 있기 때문이지요. 우리는 생각을 덜 심각하게 받아들이는 법을, 그 생각에 더 냉철하게 접근하는 법을 배울 수 있습니다.
"떠오르는 생각을 다 믿지는 말라" 이것은 우리의 타고난 초능력
우리는 생각을 선택하지 못합니다. 그 생각이 어떤 양상을 취할지도 통제하지 못하지요. 다만 어떤 생각은 더 오래 품으며 고취할 수 있고, 어떤 생각에는 최대한 작은 공간만을 내줄수도 있습니다. 마음 속에 불쑥 떠오르는 생각을 막을 방법은 없습니다. 하지만 그 생각을 믿을지 말지는 선택할 수 있습니다.
"엄마, 나 숲속의 승려가 되려고요."
"그래......숲속 승려를 만나본 적은 있니?"
"아뇨, 그냥 책에서 읽기만 했어요."
"그럼, 숲속 사원에 가본 적은 있니?"
"아뇨."
"비욘, 마음을 확실히 먹은거니?"
머리를 깎을 때가 되자 마음이 편했습니다. 머리를 깎는 행위는 진지하게 그 곳에 머물고자 뭔가를 포기할 각오가 됐음을 겉으로 드러냄과 아울러, 자연스럽게 자신이 손님이 아니라는 의미를 담습니다. 사원은 베낭여행객을 위한 무료 호스텔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승려들이 수행하는 도량(道場)이라는 점이 분명해지는 순간이지요.
나티코(Natthiko) '지혜롭게 성장하는 자' 라는 뜻. 저는 그 이름이 무척 좋았고 지금도 여전히 좋습니다.
승려들의 승명은 그들이 선택한 새로운 삶의 방식을 상징하는 동시에 이제부터는, 지금까지와 다른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을 상기하게 해주는 무엇입니다. '무소유'의 삶을 위한 이름이지요.
승려가 되면 마침내 진짜로 혼자가 되리라 생각했는데, 이것을 포기해야 한다는 점을 금세 깨달았습니다.
제 자신이 주말도 없이 24시간 사람들과 어울려야 하는 공동체에 합류했다는 사실을 분명히 깨닫는데는 몇주도 걸리지 않았습니다. 게다가 그 중엔 살면서 만나볼 그 누구보다도 별난 사람도 있었습니다. 우리는 방을 같이 쓸 사람을 스스로 선택할 수도 없었어요. 그나마 한 달에 한 번씩은 방이나 오두막을 바꿔 사용했습니다. '소유물'에 대한 애착을 느끼지 못하게 하려는 취지도 있었지만, 오가는 사람이 많았던 탓도 있었습니다. 마음에 드는 사람은 사원을 훌쩍 떠나는데, 별로 달갑지 않은 사람은 절대 돌아가지 않고 끝까지 버티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했습니다. 보아하니 이런 사회성 훈련은 수행을 작은 부분이 아니라 그 핵심이나 다름없었습니다. 그것만은 전혀 예상치 못했던 부분이었지요.
"우리는 해변에 쓸려온 자갈과 같다네. 처음엔 거칠고 들쭉날쭉하지. 그런데 삶의 파도가 쉼없이 밀려온다네. 우리가 그곳에 머물며 다른 자가를 사이에서 거칠게 밀치고 비비다보면, 날카로운 모서리가 서서히, 그러나 확실히 닳게 된다네. 결국 둥글고 매끄러워지지. 그러면 빛을 반사하며 반짝이게 될걸세."
인간만이 자신과 맞지 않은 다른 존재를 성가시다고 여깁니다. 사람이라면 누구나 겪는 일이지요. 하지만 누군가를 미워하고 불편하게 여길 때 우리는 엄청난 기운을 소모하게 됩니다. 우리의 힘이 줄줄 흘러나갈 구멍이 생기는 것이나 다름없지요. 다행이도 그런 문제를 해결할 방법이 있습니다. 누군가와 좀 더 편하게 지내고 싶고, 그 사람이 자기 입맛에 맞게 행동했으면 한다면 기실 방법은 딱 한가지 뿐이지요. 그들을 그 모습 그대로 좋아하는 겁니다.
단지 남들이 이렇게 혹은 저렇게 판단한다는 이유로 진심으로 바뀐 사람이 인류역사를 통틀어서 한 명이라도 있었을까요? 그럴리가 없는데도 우리는 계속해서 남들을 판단하고 우리 뜻대로 바꾸려 합니다. 거의 떼쓰는 어린 아이 같은 집요함으로 그 방식을 고집하지요. 마치 세상이 자기 뜻대로 움직여야 한다고 굳게 믿는 것처럼 말입니다. 뜻대로 되지않으면 좌절하거나 폭발하고 우울해하기도 합니다. 마치 이렇게 말하는 것 같아요.
"나는 사람들이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 알아. 사람들이 내 말을 안듣는다고? 그럼 나 자신이라도 마구 괴롭힐거야!"
우리는 자신을 너무 대단하다고 착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2022.11.17)
사람들은 저마다 민감한 감지기가 있어서, 누군가가 자기를 경계하거나 거리끼는 마음이 있으면 금세 감지할 수 있습니다. 그런 낌새를 감지한 사람은 자신감이 떨어지고 기분도 상합니다. 마음을 잘 열지 않게되는 동시에 다른 사람의 감정에도 그다지 신경을 쓰지않게 됩니다. 그 반대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의 감지기는 누군가 이렇게 생각할 때도 금세 감지할 수 있지요. "안녕! 널 진심으로 환영해. 넌 지금 모습 그내로 정말 사랑스러워. 다른 사람처럼 되려고 하지않아도 돼. 난 너의 특이하고, 유별나고, 엉뚱한 면을 다 받아줄거야. 독특하게 행동해도 괜찮아. 난 널 있는 그대로 격하게 환영해. 여기 너를 위한 자리가 있어."
누군가 그런 마음으로 자신을 맞아준다고 상상해봅시다. 당장 자신부터 더 열린 사람이 될 수 있을 것 같지않나요?
숲속 사원의 전통적인 문화는 합의를 기반으로 합니다. 함께 지내는 승려들은 서로 상대에게 다음과 같은 마음가짐으로 임해야 합니다. '나는 당신과 함께 협력할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당신은 완벽하지 않아도 됩니다. 지적으로 뛰어나지 않아도 됩니다. 설사 내가 당신을 좋아하지 않더라도 괜찮습니다. 그래도 나는 당신과 함께 협력할 준비가 되어있습니다.'
기본적으로 모든 걸 함께 하겠다는 각오가 서야 사원에서 순조롭게 생활을 영위할 수 있습니다. 모든 울력(여러사람이 힘을 모아 일하면서 게으름을 몰아내는 수행)은 한 가지 원칙에 따라 이루어집니다. 바로 무엇을 하든 열과 성을 다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원에서는 어떤 활동이 다른 활동보다 더 유익하다거나 중요하지 않습니다. 동네 병원의 간호사들에게 설법하는 일이 마당을 쓸거나 설거지하거나 뒷정리하는 일보다 더 낫거나 멋지지 않습니다.
우리는 그렇게 함께 사는 법을 배웠습니다. 그 해변에 머물며 쉼없이 밀려오는 파도에 서로 부딪치면서, 날카로운 모서리를 갈고닦아 점점 둥글둥글해졌습니다.
아침 8시30분, 하루 중 유일하게 공양하는 시간이었습니다. 하루 한끼만 먹는 일종식(一種食)에 적응하기까지 몇년이 걸렸지요. 처음엔 걸으면서 명상하는 행선(行禪) 시간의 대부분을 피자와 아이스크림 생각만 하면서 보낼 정도였습니다. 사원에서 사흘 이상 머무는 승려와 손님은 음식이 나오기 30분 전에 공양간 옆의 선당에서 대기해야 했습니다. 마음을 차분히 가다듬고 음식을 기다리라는 뜻이었지요. 공양시간은 무의식적으로 음식을 먹는 시간이 아니라 사색하는 과정이었습니다.
공양시간은 9시30분에 끝났습니다.
사원의 수행자는 사람들이 '보통의 삶'에서 소중히 여기는 모든 것에서 등을 돌린 이들입니다. 열심히 일하고 나서 동료들과 기울이는 술 한잔, 친구들과 함께하는 저녁만찬, 연인과 나누는 깊은 친밀감, 자기 아이를 낳고 사랑하며 기르는 일 같은 것들 말이지요. 사람들이 공감하거나 납득하기 어려워하는 선택으로, 스티나는 질문했습니다. "그런데 비욘, 사람들이 죄다 승려가 되겠다고 마음먹는다면 세상은 어떻게 될까요?"
처는 차분한 목소리로 대답했습니다.
"스티나, 세상사람들이 죄다 방송사의 언론인이 되겠다고 결정할 때와 같지않을까 싶습니다."
"갈등의 싹이 트려고 할 때, 누구와 맞서게 될 때, 이 주문은 마음 속으로 세 번만 반복하세요. 어떤 언어로든 진심으로 세 번만 되뇐다면, 여러분의 근심은 여름날 아침 풀밭에 맺힌 이슬처럼 사라질 것입니다."
'내가 틀릴 수 있습니다.
내가 틀릴 수 있습니다.
내가 틀릴 수 있습니다.'
뇌가 분석하기도 전에 몸이 먼저 진실을 인식하고 반응할 때의 기분을 다들 알겁니다. 그런 말은 여러분의 몸과 마음에 새겨져 절대 사라지지 않지요.
제 안에는 고집 센 네살배기 꼬마가 사는데, 이 꼬마는 사소한 일로 불쑥 튀어나오곤 합니다. 흥분하거나 괴로워해봤자 별 소용이 없는데도 그 순간에 참지 못하고 화를 터뜨려요. 정당한 근거가 없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일단 우기고 봅니다. '아차!' 싶었을 땐 이미 늦었지요. 고맙게도 제 아내는 저보다 더 침착하고 감정적으로 성숙한 사람입니다. 그래서 그 날 아침에도 네살배기 꼬마를 상대로 유머감각을 잃지않고 침착하게 말했습니다. "비욘, 당신이 어제 강연에서 말했던 그 주문말인데, 지금이 그 주문을 사용할 적기가 아닐까?"
"옳다는 것이 결코 핵심이 아니라네."
인간은 본래 자신이 더 행복해지는 방향으로 살아가려는 습성이 있습니다. 그리고 '내가 틀릴 수 있어. 내가 다 알지 못해.' 라는 생각에 익숙해지는 것 만큼이나 우리가 확실하게 행복해질 방법은 흔치 않습니다.
우리는 거의 무의식적으로 직감을 현실이라고 믿습니다. 주변에서 벌어지는 온갖 사건을 정확하게 해석할 수 있다고, 다 간파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어떤 상황이 옳은지, 그른지, 좋은지 나쁜지를 판단하고 결정할 수 있다고 믿지요. 우리는 걸핏하면 삶이 우리가 원하는 방식대로, 우리가 계획한 방식대로 마땅히 흘러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실상은 좀처럼 그렇게 되지 않습니다. 우리의 막연한 관념과 의지대로 삶이 이루어지리라고 기대하지 않는 것이 지혜의 시작입니다. 우리가 극히 무지하다는 것을 이해할 때, 지혜가 싹틉니다.
우리가 유난히 집착하는 것을 내려놓으려면 어떻게 해야할지 보여줍니다. 물건이나 감정, 신념 등 대상은 상관없습니다. 여러분도 주먹을 세게 쥐었다가 다시 손바닥을 활짝 펴보시기 바랍니다.
저는 여러분이 손을 조금 덜 세게 쥐고 더 활짝 편 상태로 살 수 있길 바랍니다. 조금 덜 통제하고 더 신뢰하길 바랍니다. 뭐든 다 알아야 한다는 압박을 조금 덜 느끼고, 삶을 있는 그대로 더 받아들이길 바랍니다.
인간의 정신적, 초월적 성장은 심리적인 대응 전략을 익힌다고 얻을 수 있는 게 아닙니다. 진정 성장하려면 마음의 짐을 내려놓아야 합니다. 번뇌에서 멀어지고, 설사 번뇌에 빠지더라도 금세 벗어나는 법을 익혀야 합니다. 물론 살아가며 고민과 갈등이 아예 없을 수는 없습니다. 번뇌를 완전히 내려놓는 것은 적절한 목표가 아닙니다. 번뇌에서 완전히 해방되는 것은 죽은 사람 뿐입니다.
성장하려고 노력하는 과정에서 고민이 서서히 줄어든다면 올바를 길로 나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어쩌면 건전한 거리를 두고서 자기 자신을, 자신의 성격과 결점에 대해 품었을지도 모른는 온갖 의견을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나티코, 기적이 일어날 여지를 꼭 남겨두세요." 스님의 말이 옳았습니다. 실제로 저는 모든 걸 통제 하려들고 있었습니다. 그럴수록 삶은 외롭고 고달프며 불안하고 초조해지는 법인데 말이지요. 삶을 더 믿고 맡겨야 했습니다. 삶에서 가장 좋았던 일들은 거의 대부분이 제 계획이나 노력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었습니다. 모든 것을 지시하고 예측하려들수록 즐거움은 사라지고 더 괴로워집니다. 긴장할수록 지성의 일부가 사그라질 뿐이지요.
우리의 마음은 감정적으로 두드러졌던 일, 특히 어렵과 고통스러웠던 일을 기억하도록 프로그램이 짜여 있습니다.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그 덕분에 우리 선조는 사바나 초원에서 살아남고 번성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과거라고 부르는 것은 실제로 벌어졌던 일이 아닙니다. 흔히, 감정적으로 격앙된 상황에서 선별한 단편적 조각에 불과합니다. 그런데도 그 조각들은 우리가 투영하는 미래를 위한 기초를 제공하고, 우리가 상상하는 미래를 위한 토대가 됩니다. 그것은 미래가 아닙니다. 우리의 가정이고 추측일 뿐이지요. 확실히 무슨 일이 벌어질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그 누구도요.
승려가 되면 과거에는 당연한 권리였던 선택들을 모두 내려놓고 주어진 상황에 적응하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그러한 수행은 우리에게 놀라운 선물을 안겨줍니다. 삶이 불확실해질 때도 흔들리지 않게 해주고, 앞날을 모를 때도 내면의 평화를 지킬 수 있게 해줍니다.
이 모든 것은 결국 헛된 노력을 덜 기울이며 살아가기 위한 것입니다. 자신이 알고 있다는 믿음과 미래에 덜 집착하고, 삶이 실제로 벌어지는 유일한 장소인 지금 여기에 더 마음을 여는 과정입니다.
실은 누구나 인간의 삶에 확실한 것이 하나도 없다는 점을 잘 알것입니다. 이승에서 우리에게 분명한 것은 단 한 가지, 바로 삶이 언젠가는 끝난다는 점입니다. 나머지는 희망, 두려움, 가정, 소망, 예상, 의도 등입니다. 그 사실을 알고 받아들일 때 저도 모르게 꾹 쥐었던 주먹이 스르르 풀리고, 펼친 손은 삶으로 가득 찰 것입니다.
"항상 너 자신부터 시작해야 하느니라." '자리이타(自利利他)'
"알라신은 믿되, 타고 갈 낙타는 묶어두라." 이슬람 격언
ALS(Amyotrophic Lateral Sclerosis, 근위축성측색경화증 : 일명 루게릭병)
우리는 늘 자기자신과 함께 살아갈 수 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행동과 기억은 우리가 앉아있는 목욕물과 같습니다. 그 깨끗함은 자신에게 달려있습니다.
"오늘은 참 죽기 좋은 날이군."
만나는 사람마다
네가 모르는
전투를 치르고 있다.
친절하라,
그 어느 때라도.
'전쟁이 끝났다. 백기를 흔들어라.' 화해는 그 때부터 시작됩니다.
화난 사람에게 절대로 내려놓으라고 말해서는 안됩니다. 그 말이 통하지 않는건 물론이고 오히려 상대를 자극할 뿐이지요. 내려놓으라고 말해야 할 상대는 자기자신 뿐입니다. 그 때만 유일하게 효과가 있지요.
"화가 나긴 하지만, 그 화는 아무것도 차지하지 못합니다."
'신은 당신이 절대 찾지않을만한 장소에 가장 귀한 보물을 숨겨두었다. 바로 당신의 주머니다.' 힌두교 격언
영국인 기자가 태국 국왕에게 서양 기독교 원리 개념을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물었다. 그러자 국왕은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
"불교도로서 우리는 원래의 죄(Original sin)가 아닌 원래의 순수(Original purity)를 믿습니다."
숨을 거둘 날이 오면, 그 날이 언제든 저더러 싸우라 하지말아 주세요. 오히려 제가 다 내려놓을 수 있도록 어떻게든 도와주길 바랍니다. 제 곁을 지키며 다 괜찮을거라고 말해주세요. 우리가 감사해야 할 것들을 다 기억할 수 있게 도와주세요. 때가 됐을때 제가 늘 원했던 끝이 어떤 것인지 기억할 수 있도록 당신의 열린 손바닥을 보여주세요.
엘리사베트, 그 때 아직 내 곁에 누워있지 않다면 얼른 침대로 올라와서 나를 안아주구려. 그리고 내 눈을 바라봐요. 내가 이 세상에서 마지막으로 보는 게 당신의 눈이었으면 좋겠소.
2022.11.19. 青山 生日날 저녁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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