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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62. 곁에 두고 읽는 니체, 사이토 다카시, 이정은 옮김, (주)홍익출판사, 2015.

햇살처럼-이명우 2023. 10. 21. 09:51

662. 곁에 두고 읽는 니체, 사이토 다카시, 이정은 옮김, (주)홍익출판사, 2015.

들어가기 전에, 니체,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프롤로그 생명은 타오르는 불꽃이다.

PART 1. 한 발의 화살이 되어라.
  1. 내일을 향한 화살
  2. 자화자찬의 힘
  3. 분노의 불꽃으로부터 도망쳐라.
  4. 자기 삶에 박수를 쳐라.
  5. 들판의 무소처럼 혼자 살아라.
  6. 더 크게 기뻐하라.
  7. 향상심이 없으면 죽은 인간이다.
  8. 그대의 고독 속으로 도피하라.

PART 2. 이것이 삶이던가. 그렇다면 다시 한 번
  1. 지금이야말로 분발할 때다.
  2. 자기 자신을 깨뜨리다.
  3. 인생의 목적은 끊임없는 전진이다.
  4. 나의 시대는 아직 오지 않았다.

PART 3. 몸의 소리를 들어라.
  1. 아이처럼 춤을 추어라.
  2. 건강한 몸의 소리를 들어라.
  3. 세상을 큰 강처럼 품어라.
  4. 욕망의 우물에 덮개를 덮지마라.
  5. 대지와 호흡하라.

PART 4. 꿀벌처럼 나누는 삶
  1. 인생의 진짜 기쁨이 있는 곳
  2. 행동하는 자 만이 배울 수 있다.
  3. 삶을 축제로 만드는 기술
  4. 밝고 가벼운 기분으로 살아라.

PART 5. 창조적인 삶은 어디서 오는가.
  1. 힘은 아름다움에서 나온다.
  2. 쾌락과 고통은 마주보고 있다.
  3. 내 삶에 던지는 의문부호
  4. 스스로으 힘으로 돌아가는 바퀴처럼
  5. 인생으로부터으 최후통첩
  6. 아모르 파티, 자신의 운명을 사랑하라.
  7. 세상의 변방을 지키는 사람들

덧붙이는 글, 큰 웃음을 짓는 사람이 되어라.
에필로그. 온몸을 던지며 살아라.
부록. 내 인생에 힘이 되어준 니체의 말

  프리드리히 빌헬름 니체(1844-1900) 프로이센 작센 주 뢰켄에서 목사의 아들로 태어났다. 독일 본 대학에서 공부, 라이프치히 대학으로 옮겨 아르투르 쇼펜하우어의 사상을 공부함. 음악에도 특출하여 오페라 음악의 대가인 바그너(리하르트 바그너 Richard Wagner), 고전문헌학자이자 그리스 종교철학자였던 에르빈 로데(Erwin Rohde)와 교분을 나누면서 사상의 지평을 넓혀나갔다.
  스위스 바젤 대학교에 고전문헌학 교수 자리가 났을 때, 은사의 추천으로 박사학위도 없는 그가 교수로 임명된은 그의 나이 25세 때인 1869년이었다. 이후 같은 해에 라이프치히 대학교에서 별도의 시험이나 논문없이 이미 출판된 저작물만으로 박사학위를 받으므로써 장래가 촉망되는 천재학자임을 세상에 알렸다.
  1872년에 출간된 <<비극의 탄생(Die Geburt der Tragodie)>>은 오늘날 미학(美學)의 최고 고전으로 손꼽힐만큼 널리 읽히는 책이다. 1878년에는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Menschliches, Allzumenschiches)>>이 출판되었다. 실증주의 시대를 대변하는 이 책은 그리스도교와 그 도덕률을 비판 철학의 입장에서 논하고 있는데, 니체의 중기 사상을 대표하는 걸작으로 평가받는다.
  니체는 35세에 건강이 악화되어 10년 남짓해온 교수생활을 그만두고, 그 뒤로 집필 외에 그 어느 것에도 흥미를 느끼지 못한 채 외롭고 피폐한 생활을 이어나갔다. 이 기간 동안 시력을 거의 잃었고, 몇 사람을 제외하고는 누구와도 접촉하지 않고 은둔 생활을 계속했다.
  1883년부터 1885년까지 4부에 걸쳐 출판된 철학적 서사시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Also Sprach Zarathustra)>>는 그가 쓴 책들과 마찬가지로 출간 당시에는 거의 주목받지 못했다. 심지어 4부에 해당하는 책은 아무도 관심을 쏟지 않아 40부 정도만 출판될 정도였다.
  니체의 대표작인 이 책에는 그의 중심 사상인 힘에의 의지, 초인, 영접회귀 같은 문제들이 다양한 비유와 상징과 함께 전개되어 있다. 기존의 그리스도교적 질서를 비판하면서 현대인의 중심문제를 예언한 이 책은 비록 당대에는 너무 난해하고 이단적이라는 이유로 철저히 무산되었지만, 그가 죽은 뒤에 재평가되기 시작하여 마침내 20세기 이후에 철학자나 작가, 문화예술인에게 가장 큰 영향을 끼친 책으로 꼽히게 되었다.
  니체는 1889년 <<선악의 저편(Jenseits von Gut und Bose)>>, 1887년에 <<도덕의 계보학(Zur Genealogie der Moral)>>을 연달아 출판했지만 독자들은 여전히 그를 외면했다.
  1888년은 니체의 정신이 그나마 온전했던 마지막 해로, 젊은 시절 한 때 정신적 교감을 나누었던 바그너를 비판하는 <<바그너의 경우>>와 <<우상의 황혼>>, <<이 사람을 보라>>등 다양한 저작들을 쏟아내며 마지막 창작혼을 불태웠다.
  1889년 이탈리아 토리노로 건너간 니체는 길거리에 쓰러진 뒤 정상적 정신능력을 완전히 상실했고, 정신착란에 시달리다 1900년 8월, 56세의 나이로 죽었다.
  니체는 명석한 두뇌와 탁월한 통찰력을 지닌 철학자였음에도 살아 있는 동안 일반 대중은 물론이고 학계로부터 철저히 외면 당했다. 또 종교계와 윤리주의자들로 부터 사회를 타락시킨다는 악의적인 비난에 시달리며 평생 외롭고 고단한 삶을 이어갔다. 그러나 그는 사후 유럽 철학과 문학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고, 오늘날에는 19세기를 살았던 철학자 중 가장 위대한 인물로 기억되고 있다.
  니체의 사상은 세상을 억압하는 온갖 권위에 철저히 불복하는 태도를 견지했던 쇼펜하우어로부터 크게 영향받은 까닭에 세상을 뒤엎으려는 혁명적 사상으로 간주되었다. 그렇게 기독교인들이나 도덕관념주의자들로부터 혹평을 받았지만 니체가 현대철학에 끼친 영향은 절대적이다. 20세기 이후 지식인들은 니체가 프로이트와 마르크스와 함께 근대 철학을 뛰어넘는 위대한 사상가라는 데 이의를 제기하지 않는다.

  한때, 니체는 나치즘과 파시즘에 연관되었다고 여겨지기도 했다. 이는 전적으로 오해에서 비롯된 일로, 그의 여동생 엘리자베트 때문에 일어난 것이다.  그녀는 국수주의자이자 반 유대주의인 남자와 결혼했다가, 남편이 죽자 히틀러에 대한 열렬한 지지를 나타내기 위해 니체가 죽은 1년 뒤인 1901년에 그의 만년 유고들을 자의적으로 짜깁기 해 <<권력에의 의지>>를 출판했다. 바로 이 때문에 대중들은 한 때 니체를 독재자 히틀러와 연결지어 오해하게 되었던 것이다.  

  저작, <<그리스 비극 시대의 철학,1870>>, <<비극의 탄생,1872>>, <<반 시대적 고찰, 1873>>,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1878>>, <<방랑자와 그 그림자, 1880>>, <<아침 놀, 1881>>, <<즐거운 학문, 1882>>,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1883-85>>, <<선악의 저편, 1886>>, <<도덕의 계보, 1887>>, <<바그너의 경우, 1888>>, <<우상의 황혼, 1888>>, <<이 사람을 보라, 1888>>, 그 밖에 문헌학과 철학에 관련한 수 많은 저서를 남겼다.

  두려움이나 소심함, 우유부단함 같이 어른이 되면 마음에 달라붙게 되는 정신의 때를 깨끗이 털어내 주는게 바로 니체의 철학이다. 살면서 꼭 곁에 두고 읽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니체만큼 보통 사람들의 생활에 날마다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철학을 말한 사람도 없다. 헤겔의 철학이론은 학문적인 지식과 사상을 통합하는 것에서 출발했기 때문에 일반인들에게는 다소 어렵게 다가온다. 칸트는 이성의 구조를 알아내기 위한 치밀한 통찰에 집중했기 때문에 실생활에서 순발력있게 활용하기엔 너무 장엄하다.
  기독교나 불교가 가르치는 진리는 마음에 새겨 평생의 좌표로 삼기에는 좋지만, 일상 생활에서 행동의 지침으로 삼기에는 다소 어려운 담론이다. 이 종교들은 자기 반성적인 가르침에 기초를 두고 있어 세상을 살아가는 실제적인 가치와는 조금 거리가 있다.
  현대인들은 누구나 바쁜 생활을 반복하고 있다. 곳곳에서 높다란 장벽과 난간을 만나고,  시시때때로 온갖 형태의 어려움에 봉착하면서 세월의 무게에 대책없이 휘둘리기도 한다. 바로 그럴 때 니체를 만나기 바란다.
  니체는 아포리즘(깊은 체험적 진리를 간결하고, 압축된 형식을 나타낸 짧은 글, 금언, 격언, 경구, 잠언 따위를 가리킨다. 아포리즘은 일견 '이언(俚言)'이나 '속담' 처세훈과 흡사하지만, 이언이나 속담은 널리 유포되어 사용되면서도 작자가 분명하지 않으나, 아포리즘은 작자의 獨自的인 창작이며 또한, 교훈적 가치보다도 순수한 이론적 가치를 중요시하는 점이 '처세훈'과는 다르다.) 을 특징으로 하는 사상가다. 핵심과 본질을 함유한 촌철살인의 잠언들은 독자의 가슴에 비수처럼 박히고, 마음에 엉겨붙은 편견과 고정관념을 단번에 흔들어 깨워 새로운 관점으로 이끌어 줄 것이다.
  나에게 니체의 철학사상을 삶의 현장 곳곳에서 새로운 시야와 활력을 가져다 주는 참고서 역할을 톡톡히 해주었다. 하지만 니체의 철학은 단지 읽기만 해서는 의미가 없다. 니체의 가르침을 실생활에 적용하여 피와 살이 되게 하는 것이 가장 현명한 '니체 활용법'이다.

  니체는 사람들이 상식이나 관습을 아무 의심도 하지않고 무조건 당연하다고 여기며 생각을 멈춰버리는 태도에 항상 의문을 제기했다. 다른 방법이 있지 않을까? 다르게 생각할 수 있지 않을까? 이렇게 궁리하며 계속 기존의 것들과는 다른 답을 찾았는데, 이런 그는 '반역의 사고를 하는 제안자'라고 할 수 있다.
  현대인들은 계속해서 혁신을 추구한다. 불변을 안정된 것이라고 여기던 시대는 오래 전에 끝났다. 이제 세상은 밤낮으로 쇄신, 버전 업(version-up)을 외치면서 현재를 뛰어넘는 새로운 방식을 요구한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참신함이고, 가장 불필요한 것은 타성이다. 멈추지 않고 새로운 것을 만들어 내는 창조적 재능과 앞서 나가는 지식이 현대인의 필수적인 무기가 된 것이다.
  니체는 당대의 철학 사상계에서는 반역자로 취급되었지만, 단지 기존의 상식들을 헐뜯기만 한 게 아니라 그것들을 대체할 새로운 가치관을 발견하고 제시하려고 노력했다는 점에서 '지식 탐험가'에 가까웠다. 니체가 단지 19세기 후반을 살았던 반역의 철학자에 머무르지 않고 지금까지 삶의 지혜를 전하는 스승 역할을 하는 이유는 56년 짧은 생애 동안 잠시도 멈추지 않았던 역동적인 사고 때문이었다.

  '동경하는 것을 향한 화살이 되어라' 는 자신이 동경하는 것을 향해 끝없이 화살을 쏘아대는 전사가 되어라' 일것이다. 초인(超人)

  나는 책을 쓸 때 막연한 계획을 세우지 않는다. 가령 '일하지 않는 젊은 세대들이 내가 쓴 책을 읽고 열의를 느낄 수 있는 글을 쓰자'고 생각하고서 집필작업을 시작하면 안된다는 것이다. 그 대신 나는 이렇게 생각한다.
  '성공하는 사람들의 기본적인 생활태도인 밝은 기운을 젊은 독자들에게 구체적으로 전달해서, 제대로 일하고 충분히 성취감을 느낄 수 있는 방법을 알려주는 내용을 써보자'
  이런 전제하에 확실한 임무(mission), 뜨거운 열정(passion), 치열한 긴장감(high-tension) 같은 핵심단어와 문장을 머릿 속에 구체적으로 그린다. 그 다음에 각 장의 소제목과 세분화된 내용들을 차례로 나열하여 문장을 펼쳐나가고, 여기에 성공한 사람들의 생생한 육성이 들어간 실제 사례를 곁들인다.

  확고한 비전을 세워야 마음 속에 잠들어 있는 의욕을 일깨울 수 있다. 흐리멍덩한 비전으로는 타인을 감동시키기는 커녕 자기 자신조차 움직일 수 없다. 목표한 바를 이뤄내기 위해서는 집요하고 뜨거운 열정이 뒤따라야 하고, 이를 지탱하는 치열한 긴장감을 유지해야 한다.

  니체는 1888년에 쓴 저서 <<이 사람을 보라>>에서 이렇게 말했다.
  나는 이 책으로 인류에게 최대의 선물을 했다.
  여기서 말하는 '이 책'은 니체의 역작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이다. 이 책은 3년 동안 학계와 대중의 철저한 외면 속에 4부까지 줄기차게 출판했지만, 마지막권은 단지 자비로 40부를 출판했을 뿐이다.

  분노의 불꽃으로부터 도망쳐라.

  프랑스어로 '르상티망(ressentiment)'이라는 말이 있다. 원한, 증오, 질투 따위의 감정이 반복되어 마음 속에 켜켜이 쌓인 상태를 말하는 이 단어는 현대인들의 가슴에 도사리고 있는 '막연한 분노' 또는 '질투'를 의미한다.

  우리는 어떤 대상으로부터 무엇을 얻어내는게 아니라 그것에 의해 촉발된 자기 안의 무엇인가를 뽑아내는 것이다. 그러니 나를 풍요롭게 해줄 대상을 찾지말고, 나 스스로가 풍요로운 사람이 되려고 항상 노력해야 한다. 이것이 바로 자기의 능력을 높이는 최선의 방법이자 풍요로운 인생을 만드는 지름길이다.

  지금은 스스로의 생각에 자신이 보잘것 없는 존재처럼 느껴진다해도, 쓸데없는 곳에 신경쓰며 맹목적으로 돌진하지 말고, 부질없는 분노나 질투에 휘둘리지도 말고, 있는 그 자리에서 더 나은 나를 만들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 산골짜기를 헤매는 맹수가 되지 않는 길임을 잊지 말라는 충고다.

  자기 삶에 박수를 쳐라.
  박수에는 세 가지 흐름이 있다. 첫째, 분위기를 띄운다. 박수라는 단순한 행위로 공기가 뜨거워지고, 그 자리에 있는 사람들의 관계가 순식간에 가까워지게 된다. 둘째, 박수 받는 쪽의 기분이 좋아진다. 칭찬을 받는 사람은 자신감을 갖게 되고, 칭찬해 주는 사람에게 자연스레 호감을 느끼게 된다. 세째, 이것이 최대의 효용인데, 박수를 치면 분노나 질투의 진흙탕에서 탈출할 수 있다는 것이다.  
  하이파이브도 그런 행위 중의 하나다. 시합을 하다가 상대선수가 훌륭한 기술을 보이면 선뜻 손을 내밀어 축하의 의미로 하이프이브를 하고 엄지손가락을 치켜올려 상대를 칭찬한다.

  '무소의 뿔'은 최초로 성립된 불경인 <<숫타니파타(經集)>>에 나오는 말로, 무소는 코뿔소를 뜻한다. 코뿔소는 원래 무리를 짓지않고 홀로 살아가는 습성이 있다. 고대의 수도승들도 걸식을 하며 홀로 수행하여 깨달음의 경지에 도달했다. 이 처럼 깨달음의 길은 혼자서 가는 길이기에 무소의 뿔이 한 곳을 향하듯이 혼자 살라는 충고이다.
  같은 길을, 나보다 우수하거나 최소한 동등한 사람과 함께 가는 것은 좋지만, 그렇지않다면 차라리 혼자 가라는 붓다의 가르침은 우리가 알고있는 너그럽고 선한 이미지의 붓다와는 다르기에 사뭇 놀랍다. 평생을 세상 사물에 대한 관용을 주장했던 붓다라면 어떻게든 뭇사람들과 '더불어, 함께' 가라고 할 것 같은데 말이다.

  니체에게 있어 우정이란 독립적으로 살아갈만한 능력을 가진 사람들만이 나눠가질 수 있는 감정이었다. 그만큼 인간관계에 까다로운 니체였기에 평생 변변한 친구조차 없이 말 그대로 무소의 뿔처럼 혼자 살았던 것이다.
  니체는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에서 진정한 우정을 나누는 모습에 대해 이렇게 썼다.
  함께 침묵하는 것은 멋진 일이다. 하지만 그보다 더 멋진 일은 함께 웃는 것이다. 두 사람 이상이 함께 똑 같은 일을 경험하고 감동하며, 울고 웃으면서 같은 시간을 보낸다는 것은 너무나도 멋진 일이다.

  작은 일에도 최대한 기뻐하라. 기뻐하면 마음의 잡념을 잊을 수 있고, 타인에 대한 혐오감이나 증오심도 옅어진다. 부끄러워하거나 참지말고 마음이 이끄는대로 마치 어린아이들처럼 싱글벙글 웃어라.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우리가 지금보다 더 즐겁게 살아갈 방법을 알게 된다면, 타인에게 고통을 주면서 기뻐하는 기분 따위는 자기 자신 안에서 깔끔히 해결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면 타인에게 고통이 되는 것을 생각해내는 일도 아예 사라질 것이다.
  결국 학교에서 학생들에게 가장 중요하게 가르칠 것은 외국어나 수학이 아니라, 지금의 삶을 더 즐겁게 살아갈 방법이 무엇인지 탐구하는 자세라는 것이다.
  지금보다 더 좋은 내일을 만들기 위해 적극적으로 향상심을 품으면 주위사람을 경멸하거나 무시하는 태도는 상상도 할 수 없을 것이다. 이런 마음이 부족하기 때문에 다른 사람을 괴롭히게 되고, 상대가 지겨워지면 대상을 바꿔가면서 따돌리는 것이 가해학생의 습성이다.

  향상심이 없으면 죽은 인간이다.

  니체는 사이비 평등주의를 외치는 사람들을 대형 독거미인 '타란툴라' 같은 존재라고 불렀다. 높은 가치를 이루기 위해 살아가는 사람들을 그런 자들이 평등이라는 미명아래 끌어내리려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니체는 이런 일이 열심히 살아가는 사람들에 대한 르상티망, 즉 막연한 분노나 질투 때문에 생긴 것이람 그런 사람들을 기피했다. 니체는, 평등이 곧 미덕이라고 외치며 '우리와 동등하지 않은, 우리보다 강력한 모든 이들에게 복수하고 그들을 비방하자'며 야합하는 타란툴라들의 행태에 몹시 분개했다. 타란툴라들이 말하는 아래로의 평등은 개인이 저마다 가지고 있는 특별함을 말살하는 살인행위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진정한 자아를 찾기 위해 누군가를 간절히 원한다. 자기를 상대해 줄 친구를 찾고, 막연한 안도감을 느끼기 위해 누군가에게 의지한다. 고독하기 때문이다. 왜 고독할까? 자신을 제대로 사랑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순간적인 기쁨을 나누는 친구가 아무리 많아도 고독으로 인한 상처는 쉽게 치유되지 않을 것이다. 자신을 진정으로 사랑하기 위해서는 먼저 무언가에 온 힘을 쏟아야 한다. 자신의 다리로 높은 곳을 향해 걸으면 고통이 따르지만, 그것은 마음의 근육을 튼튼하게 만드는 고통이다.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마음의 근육이 단단한 사람은 작은 인간들에게 휘둘리지 않고 혼자 있어도 외로움에 떠밀려다니지 않는다.

  주어진 운명에 당당히 맞서라. 알베르 까뮈의 <시시포스의 신화>의 첫 문장은 "단 한가지 참으로 중요한 철학적 문제가 있다. 그것은 자살이다. 인생은 살만한 가치가 있는가?"

  어떠한 곤경에도 자신의 삶을 열심히, 기어이 살아내는 불굴의 의지는 인간이 신에게 내놓을 수 있는 유일한 무기다. 그렇게 시시포스는 자신의 운명을 묵묵히 짊어짐으로써 결과의 무의미함을 절차의 충실함으로 전환시켰던 것이다.
  '이런 일은 내가 할 짓이 아니다. 나한테는 무의미하다며 처음부터 포기하지않고 과정에 전력을 다함으로써 자신의 존재를 찾아낸다면 어떻게 될까? 발단이나 결말이 아니라 과정이라는 시점에서 상황을 파악하면 모든 일이 전혀 다르게 보인다. 카뮈가 시시포스를 통해 주목한 사실도 바로 이것이었다. 현재를 충실히 산다는 것의 중요한 의미 말이다.

  니체는 높은 곳을 향해 끊임없이 노력하는 것은 결코 헛된 일이 아니라며 청년들을 다독였다. 그 때 필요한 것이 바로 용기다. 용기가 없으면 아무리 큰 목표를 가지고 노력을 해도 모래성을 쌓는 것처럼 금세 허물어진다.

  몇 번이나 처음부터 다시 시작할 용기

  좁스럽게 살지말라.
  "태산불양토양 고능성기대(泰山不讓土讓 故能成其大) 태산은 한 줌의 흙도 사양하지 않았으므로 그렇게 높을 수 있으며, 하해불택세류 고능취기심(河海不擇細流 故能就其深) 하해는 작은 물줄기라도 가리지 않았으므로 그 깊음에 이른 것이다." -이사(李斯)-

  앞을 가로막는 난관이나 장애도 한 입에 먹어치워 버리겠다는 기개가 있어야 웬만한 고통은 웃으며 넘길 수 있다. 살면서 늘 작은 물줄기까지 품는 큰 강물의 마음가짐으로 세상과 마주한다면, 당신은 이미 또 한 사람의 차라투스트라다.  

  체득한 지식을 10년 동안 깊이 재워두라는 것이다. 머릿속으로 들어오는 지식이나 지혜를 차곡차곡 쌓아두면 그것을이 서로 화학적으로 결합해 또 다른 지혜로 발전한다. 이러한 과정을 거치면 누구라도 '10년산(産)'의 가치있는 지식을 지닌 사람이 된다. 삶을 풍부하게 하는 지혜와의 만남을 쌓아가는 일에 인생이 기쁨이 있다.

  배우고, 지식을 쌓고, 그것을 교양이나 지혜로 확장해 나가는 사람은 삶이 지겨울 틈이 없다. 왜냐하면 모든 것이 전보다 한층 흥미로워지기 때문이다. 그는 다른 사람들과 똑같은 것을 보고 들어도 사소한데서 교훈을 찾아내고, 사고의 빈자리를 찾아내고 빈자리를 채울 정보를 얻어낸다. 그리하여 마침내 그의 삶은 더 많은 지식과 의미있는 충만함으로 가득해진다.

  공부할 수 있는 삶은 감사한 일이다.
  예전에는 일본에도 중국 오지 마을의 어린 소녀처럼 학문에 목마른 사람들이 많았는데, 지식과잉의 시대가 되자 지식이 선물이라는 사실을 완전히 잊어버리고 말았다. 태양빛 처럼 아주 당연한 일로 받아들이기 때문이다. 너무 쉽게 얻을 수 있게 되어 감동을 느끼지 못하는 것이다.

  나는 지식을 다른 사람들에게 보내는 고귀한 선물로 보는게 옳다고 본다. 이런 마음으로 공부를 하면 학문을 탐구하는 일은 기분 좋은 축제가 된다.

  참된 교육자는 경력이나 실적에 의해 평가되지 않는다. 학생들의 능력을 최대한 발휘할 수 있도록 이끌어 주는가가 가장 중요하다. 결국 진정한 교육자는 학생들을 굴레에서 해방시켜, 그들로 하여금 생동감에 넘쳐서 자유롭고 활발하게 자기의 능력을 발휘할 수 있도록 인도하는 사람이다.  

  사람은 항상 껍질을 벗고 새로워져야 하고 항상 새로운 삶을 향해 나아가야 한다. 그렇게 한층 새로운 자기를 만들기 위한 탈바꿈을 평생 동안 멈추지 마라. <즐거운 학문, 니체>

  자기 삶을 배움의 축제로 만드는 사람은 이미 차라투스트라다.

  산다는 것은 그 자체로 축제다.
  어린아이들을 보라. 나이가 어릴수록 일상의 모든 일이 축제다 아이들의 호기심을 보면 이를 알 수 있다. 아이들은 눈에 보이는 것이나 귀에 들리는 것은 무엇하나 빼놓지 않고 이무 제한없이 관심을 쏟는다.
  "이건 뭐야? 왜 이렇지? 누가 그랬지?"
  세상에서 가장 맑은 눈으로 주변 사물을 대하면서 천진난만하게 의문을 품는 아이들의 태도를 니체는 춤을 추는 것과 같다고 말했고, 이것이 바로 자기가 꿈꾸는 이상 그 자체라고 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어른이 되어감에 따라 이런 감각은 점차 옅어진다. 웬만해서는 감동도 없고, 관심마저 없다. 어른들에게 삶을 축제로 만드는 기술을 되찾게 하려면 따로 재훈련이 필요할 정도로 신체감각이 무뎌지고 탁해졌다.
  왜 이렇게 되었을까? 우리는 어른이 되어가는 과정에서 많은 행동을 절제하고 금지한다. 함부로 말하고 행동했다가는 자칫 이상한 사람 취급받기 십상이고 직장인이라면 '아직 어린애 티를 못벗었다!' 라며 괴짜 소리를 듣는다.
  어른스럽다는 말을 들으려면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것들을 무심히 대해야 하고, 소소한 일상에서 기쁨을 찾는 일 역시 잊어야 한다. 하지만 니체는 이런 삶을 최악이라고 생각했다.

  축제라 해서 온통 시끌벅적하기만 할 필요는 없다. 시를 읊거나, 오페라 아리아를 부르거나 하는 예술적 이벤트 역시 하나의 축제로, 사람들의 마음을 따뜻하고 행복하게 하나로 묶을 수 있다면 모든 것이 축제다.
  산다는 것 자체를 하나의 축제로 여기면, 우리의 삶은 목표가 아니라 과정이 더 중요해진다. 공부도, 사업도, 과정을 즐기고 지금 이 시간의 기쁨을 최고 가치로 만든다면 원하는 결과는 당연히 따라온다.  

  우리는 익숙한 것들을 너무 소홀히 여긴다. 어떤 사람들은 살기위해 먹고, 정욕때문에 아이를 낳는다고 말할 정도다. 그들은 현재보다 더 나은 멋진 삶은 여기가 아닌 어느 먼 세상에 있는 것처럼 말한다. 우리는 이제 현재의 삶을 확고히 지탱하고 있는 모든 것들에 흔들림이 없은 믿음의 시선을 보내야 한다. 이런 태도만이 우리를 제대로 살게 만들기 때문이다.

  목표가 투명하고 단단할수록 장인정신의 과정은 축제의 모습을 띠게된다. 달리 말하면 분명한 목표를 품을수록 축제같은 기분으로 살아야 한다.

  인생의 목적은 끊임없는 전진이다. 먼 곳으로 항해하는 배가 풍파없이 조용히 갈 수만은 없다. 풍파는 늘 전진하는 사람의 벗이다.

  진정한 용기는 인간을 죽음 앞에서도 당당하게 한다.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사람들은 일정한 틀에 묶어두면 신선한 발상과는 점점 거리가 멀아진다. 사람은 한 번 정해진 자기만의 공간에 익숙해지면 달팽이처럼 그 곳에 숨어드는 경향이 있고, 그러면 새로움 생각마저 멈춰버리게 되기 때문이다.
  '창조적인 일을 하든 평범한 일을 하든, 항상 밝고 가벼운 기분으로 임해야 순조롭게 잘 풀린다. 그래야 사소한 제한 따위에 연연하지 않는 자유로움이 생기기 때문이다. 평생 이런 마음을 지켜나가면 그것만으로도 많은 일을 이루는 사람이 될 것이다.'

  '우리는 역사를 나와는 전혀 관계없는 일이라고 생각하거나 도서관의 낡은 서가에 꽂혀있는 오래된 책으로 여기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우리들의 매일의 삶 자체가 곧 역사다. 지금 무엇을 위해 살고 어떻게 행동하는가. 그것이 바로 매일의 역사를 만든다. 두려워하거나 허둥대지않고 오늘 하루를 마쳤는가? 게으르게 보냈는가? 용감하게 도전했는가, 어떤 일을 어제보다 더 나은 방법으로 행했는가, 이 같은 태도들이 하나하나 쌓여 매일의 역사를 만드는 것이다!' <<아침놀>>

  우리의 삶 자체가 거대한 역사책이다. 페이지 마다 내용은 남이 채워주지 않는다. 그러니 사소한 생각과 행동에도 늘 신선한 감각을 유지하면서 페이지를 메워나가야 한다. 밝고 가벼운 발걸음으로, 부지런히 용감하게.

  책을 읽고 거기서 무언가를 인용해보라고 하면, 대부분의 사람들이 단 몇 줄도 제대로 외우지 못했다. 니체는 이것을 독서하는 게으름뱅이들의 전형적인 형태로 여겼다.
  진정한 가르침은 자신의 내면에 깊이 확실하게 넣어두는 보물과 같은 것으로 생각할 때 더 빛난다. 진정한 보물은 자유자재로 꺼내쓸 수 있어야 하는 것이다.
  그러려면 반복해서 외우고 또 외워서 확실하게 자기 것으로 만들어야 한다. 그 정도가 아니면 정말로 알았다고 할 수 없기 때문이다. 소리내어 읽고 기억하는 과정을 거칠때 비로소 칼끝처럼 날카로워진 지식이 나의 재산으로 축적된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그것은 단지 언젠가 한 번 읽은 것일 뿐, 영원히 나의 피와 살이 되지 않는다.


  머리에만 담지말고 몸의 일부가 되게하라.

  가짜교사들이 가르치는 것은 하나같이 가치를 판단하는 기술적인 방법 뿐이다. 그들은 인간과 사물의 본질에 대해서는 절대 말하지 않는다.

  "사람은 본래 아름다운 것을 보면, 그것만으로도 건강해진답니다."

  니체는 '진정한 숭고함은 휴식이나 웃음, 또는 아름다움 없이는 성립되지 않는다' 라고 했다. 아름다움을 대함으로써 얻게 되는 감동을 삶의 에너지로 전환시키는 회로를 갖는 것이 살아가는데 중요한 힘이 된다는 뜻이다.

  어떻게 살아야 할지 삶의 방법론을 담은 책은 많지만, 내가 맞는 것을 찾기는 어렵다. 타인의 방식이 내게 맞지않는 것은 당연한 일이니 전혀 이상할 게 없다. 문제는 내가 던지는 '왜?' 라는 물음의 내용을 나 스스로 전혀 인식하지 못하는데 있다. 왜 그 일을 하고 싶은가? 왜 그렇게 되려고 하는가? 왜 그 길로 가려고 하는가? 내면으로부터의 이런 물음에 분명한 평가기준을 갖추지 못했기 때문에 답을 찾지 못하는 것이다. '왜?' 라는 의문부호에 스스로 답을 제시할 수 있어야만 무엇을 어떻게 해야할지 알게됨으로써, 이제 그 길을 가는 일만 남게 되는 것이다. <<우상의 황혼>>    

  순수한 호기심

  일반적으로 '지혜'라고 하면 나이가 든 현자가 가지고 있을법한, 조용하고 중후한 이미지를 떠올리게 된다. 하지만 니체는 플라톤이나 공자 같은 인류의 스승으로 추앙받는 현자들을 거부했고, 한 발 더 나아가 사람들을 현혹시키는 그리스도교와 불교, 여기에 소크라테스까지 포함시켜서 퇴폐 또는 타락이라는 의미의 '데카당(decadent)' 이라고 부려며 비판했다.
  특히, 니체는 그리스도교에 치를 떨었다. 인간이라면 누구나 혼자 힘으로도 더 고귀하고 깊은 삶을 사는 것이 얼마든지 가능한데 왜 굳이 신을 믿어야하고, 왜 신이 정한 도덕에 맞춰 살아야하며, 왜 누구도 가보지 못한 내세의 세상을 꿈꾸어야 하는가, 그것이 니체의 생각이었다.
  니체에게 중요한 것은 지금 이 순간의 삶과 그것을 만들어가는 나 자신의 힘이었다. 그랬기에 니체는 온몸으로 바람을 맞으며 바다를 건너는 강인함이야말로 진정한 현자의 모습이라고 믿었다.
  
  그대들은 아직 본 적이 없는가? 돛이 둥글게 부풀어 거센 바람에 펄럭거리면서 바다를 건너가는 것을, 그 돛처럼 정신의 거센 바람에 펄럭이면서, 나의 지혜는 바다를 건너간다.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우리가 살면서 반드시 청소해야 한는 정신의 찌꺼기는 크게 두가지가 있다. 하나는, 세상을 '이런 것이다'하고 단정하며 체념해 버리는 태도다. 어른이 되어 갈수록 사람들은 점점 세상에 대한 호기심이 사라져서 무엇이든 그냥 어림짐작으로 넘어가곤 한다.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것들에 대해, 진지한 호기심 그 자체였던 어린 시절이라면 반드시 물음표를 던지며 덤볐을 그 문제들을 지금은 그저 어쩔 수 없는 일이라며 흘려버린다.
  두번째는 두려움이다. 위험을 받아들일 결심없이 엉거주춤한 자세로 살아가면, 작은 도랑조차 뛰어넘지 못하게 된다. 니체는 그런 나약한 태도를 가장 경멸했다.

2022.12.30. 금요일 아침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