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겠네. 그런데 자네, 나를 그렇게까지 신뢰할 수 있겠는가? 아무리 마음이 통했다 한들 자네와 나는 오늘 처음 만난 사이일세."
"사람 사이의 믿음이 꼭 사귀어온 세월을 따르는 것은 아닐터. 내 목숨을 자네에게 맡기려는 마당에 세월의 깊이를 따져 무엇 하겠는가. 내가 사람을 잘못 보았다면 죽음으로 갚으면 될 것을."
시월이 되자 온 나라 안에서 성대한 동맹제가 열렸다. 고구려의 동맹제는 본래 왕이 주관하는 궁중행사로 도성에서 열렸지만, 차츰 지방에서도 중앙의 동맹제를 흉내 내어 시월의 어느 기간을 정해 천신과 수신에게 제사를 지내고 가무음주를 즐기게 되었다. 각 성마다 동맹제의 내용이 조금 달랐는데, 북쪽으로 갈수록 비무에 중점을 두는 특징이 있었다. 특히 신성은 고구려 서북단에 위치한 큰 성인데다 수시로 선비 등으로부터의 외침에 시달리는 터라, 그곳의 비무 대회는 도성인 평양성과 비교해도 그 수준이 결코 떨어지지 않았다.
둘째날부터 비무대회가 열렸다. 저가의 집에 기숙하던 을불도 이 비무대회에 참가하게 되었고, 엿새 동안의 예선을 거친 끝에 단 두 사람의 무사만 남아 마지막 승부를 치르게 되었다.
"남부 출신의 여노와 북부 대형 저가의 무사인 다루(을불)의 대결이오!"
징소리와 함께 동맹제에 참가한 관중들의 환호가 터져 나왔고 처음부터 압도적인 경기를 펼친 여노와 시간이 지나면서 차츰 제 실력을 보인 을불의 승부는 시작 전부터 모두의 관심거리가 되어 있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여노의 우세를 점치면서도 관중들은 어느새 편을 갈라 여노와 다루(을불)의 이름을 연호하고 있었다.
막 경기가 시작되려는 찰나 갑자기 나팔소리가 나더니 태왕 상부가 수십명의 신하를 대동한 채 수백 무사들의 삼엄한 호위를 받으며 대회장으로 나타났다. 이례적인 일로 본래 태왕은 동맹제 기간 동안 도성에서 의식을 주관하게 되어있었지만 이번에는 달랐다.
그 동안 폭정에 시달려온 백성들이었지만 도성에 있어야 할 왕이 이 궁벽한 변방까지 몸소 찾아와 준 것 하나만으로도 이전의 감정이 눈 녹듯 녹아버린 듯했다. 그래서 백성들은 순진무구한 존재라고 했던가?
아버지를 죽이고 안국군을 죽인 불구대천의 원수들. 백성들을 도탄에 빠지게 하고 이 나라 고구려를 무력하게 만든 무리들. 그들의 눈앞에서 자신의 무예를 뽐내야 한다는 사실에 을불은 기가 막혔다.
"콰아아앙!"
시작을 알리는 징소리가 채 멎기도 전에 여노가 무서운 기세로 몰아쳐 왔다. 아직까지도 혼란스럽기만 한 을불은 이를 막기에 급급했고, 공격하는 자와 막는 자의 칼이 불꽃을 튀며 수십합이 오갔다.
한동안 모든 잡념을 떨치고 싸움에만 전념하던 을불의 눈에 갑자기 상부의 웃는 모습이 들어왔다. 큰 적은 멀리에 있고, 작은 적은 가까이에 있었다. 을불로서는 이겨도 죽고 져도 죽는 기막힌 처지에 놓인 것이었다.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을불은 일부러 발을 헛디뎠다. 그 순간, 정확히 을불의 어때로 날아들던 여노의 칼이 허공을 갈랐고, 오히려 을불의 칼 앞에 여노가 목을 들이민 꼴이 되었다.
"졌......"
여노가 패배를 인정하려는 순간, 갑자기 을불이 들고 있던 칼을 놓치며 어깨를 여노의 칼에 갖다대고 쓰러졌다. 어안이 벙벙해진 여노가 상황을 알아차리고 뭐라 입을 열려는 순간, 우레와 같은 관중의 함성소리와 더불어 여노의 승리가 선언되었다.
관중들의 환호성과 박수소리 속에서 상부 일행이 단상에서 내려와 두 사람을 향해 걸어오고 있었다.
을불은 잠깐의 소란을 틈타 재빨리 몸을 일으켜서는 관중 속으로 몸을 숨겼다.
"이봐!"
여노는 을불을 쫒으려 했지만 이미 황의 무사들이 가로막아 한 발짝 떼기도 어려웠다. 어느새 코앞까지 다가온 상부는 여노에게 허리춤에 차고 있던 칼을 풀어 여노에게 내밀었다. 그것은 신하로서 왕의 무력을 대신해도 좋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으로 무인이 받을 수 있는 최고의 영예였다. 너무나 파격적인 대우에 관중들은 또다시 환호했다. 그러나 사라진 을블을 찾아 이리저리 둘러보던 여노는 상부가 내민 칼을 받지 않았다.
"승자는 제가 아닙니다."
말이 끝남과 동시에 여노는 갑자기 무사들의 어깨 너머로 몸을 날렸다. 그리고는 번개처럼 어디론가 사라졌다.
"너 이놈!"
저가의 집으로 돌아오자마자 급히 떠날 채비를 차리고 있던 을불은 등 뒤에 서늘한 감촉을 느끼며 그대로 동작을 멈추었다. 언제 따라왔는지 여노의 칼끝이 을불을 겨누고 있었다.
"승자는 너였다. 어찌 나를 계속 농락하는가?"
"그렇다면 네가 패배한 것이겠지. 그런데 어찌 나를 쫓아왔는가?"
"너는 거짓된 명예를 내게 덮어씌우고 떠났다. 무인으로서 그보다 큰 수치가 어디 있겠는가?"
"그렇다면 자네 역시 그 명예를 버리고 떠나면 될 게 아닌가."
"그래서 지금 여기에 있지 않나."
"나의 무례를 용서해줄 수 없겠나? 피치 못할 사정이 있었으니 이해해줬으면 좋겠군."
"다시 한 번 승부를 가린다면 너의 무례는 없던 것으로 하지."
"지금은 곤란하다. 나중에 다시 만나서 하면 안 되겠나? 나는 지금 몸을 피해야 하는 입장이라......"
"그거면 됐다."
"고맙네. 그런데 정말로 그것이면 되겠는가?"
"사실 나도 몸을 피해야 하는 처지이다. 방금 왕이 주는 칼을 내던지고 너를 쫓아왔으니, 지금쯤 병사들이 나를 찾아 이 근방을 뒤지고 있겠지."
"하하하, 정말 뼛속까지 무인이로군. 나는 네가 마음에 드는데, 우리 친구가 될 수는 없을까?"
"나 또한 네가 마음에 든다. 그러나 한 가지 조건이 있다. "
"무엇인가?"
"네가 왜 그 자리를 피했는지, 왜 거짓으로 패한 척했는지 말해다오. 그래야 내가 너를 마음으로 받아들일 수 있지 않겠나."
을불은 여노를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미 친구가 되자고 제안한 마당에 뭘 감추고 말고 할 것이 없다고 생각한 것이다.
"나는 을불이다. 돌아가신 돌고 공의 아들이자 선왕의 손자이며, 이 나라 최고의 무인이자 영웅이었던 안국군의 종손(從孫)이다. 왕 상부가 나를 찾아 죽이려 하기에 신분을 감춘 채 떠돌고 있다. 이만하면 충분한 대답이 되겠는가?"
을불의 말에 여노는 깜짝 놀랐다.
"아니! 그런 비밀을 이렇게 발설해도 되는 것이.......오?"
"너의 자존심을 상처입힌 대가이다. 이제껏 누구에게도 내 신분을 밝힌 적이 없지만 너와는 지기지우를 맺기로 했으니 말하는 것이다. 이제 나를 친구로 받아주겠는가?"
그날 밤 저가의 집에서 을불은 여노와 더불어 밤새 술을 마셨다. 그리고 여노에게 이렇게 부탁한다.
"왕에게 돌아가 관리가 되어주게. 될수 있으면 변방의 태수가 되어주게. 태수가 되어 고구려를 지킬 관병을 키워주게. 훗날 크게 쓰일 정예병을 말일세."
"알겠네. 그런데 자네, 나를 그렇게까지 신뢰할 수 있겠는가? 아무리 마음이 통했다 한들 자네와 나는 오늘 처음 만난 사이일세."
"사람 사이의 믿음이 꼭 사귀어온 세월을 따르는 것은 아닐터. 내 목숨을 자네에게 맡기려는 마당에 세월의 깊이를 따져 무엇 하겠는가. 내가 사람을 잘못 보았다면 죽음으로 갚으면 될 것을."
그렇게 두사람은 을불은 낙랑을 정벌한 고구려의 미천태왕, 여노는 평생을 을불의 친구로, 대장군으로 고구려 최고 무인으로 역사의 주인공이 되었다.
사람 사이의 믿음은 어디까지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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