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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3. 고도를 기다리며, 사뮈엘 베케트, 민음사, 2005

햇살처럼-이명우 2010. 1. 7. 11:00

93. 고도를 기다리며, 사뮈엘 베케트, 민음사, 2005

 

블라디미르 : 확실한 건 이런 상황에선 시간이 길다는 거다. 그리고 그 긴 시간동안 우린 온갖 짓거리를 다 해

가며 시간을 메울 수 밖에 없다는 거다. 뭐랄까 얼핏 보기에는 이치에 닿는 것 같지만 사실은 버 릇이 되어버린 거동을 하면서 말이다. 넌 그게 이성이 잠드는 것을 막으려고 하는 짓이라고 할 지 모르지. 그 말은 나도 알겠다. 하지만 난 가끔 이런 생각을 해본다. 이성은 이미 한 없이 깊은 영원한 어둠 속을 방황하고 있는게 아닐까? 하고 말야. 너 내 말 알아듣겠냐?

 

에스트라 공 : 인간은 모두 미치광이로 태어나는 거다. 그 중에는 끝내 미치광이로 끝나는 자들도 있고.

 

~

 

푸조 : (버럭 화를 내면서) 그 놈의 시간 얘기를 자꾸 꺼내서 사람을 괴롭히지 좀 말아요! 말끝마다 언제 언제

하고 물어대다니!  당신, 정신나간 사람 아니야?  그냥 어느 날이라고만 하면 됐지. 여느날과 같은 어느날 저놈은 벙어리가 되고 난 장님이 된거요. 그리고 어느 날엔가는 우리는 귀머거리가 될테고. 어느날 우리는 태어났고, 어느날 우리는 죽을거요. 어느 같은 날 같은 순간에 말이오. 그만하면 된 것 아니냔 말이오? (더욱 침착해지며) 여자들은 무덤위에 걸터앉아 아이를 낳는 거지. 해가 잠깐 비추다가 곧 다시 밤이 오는 거요.(그는 끈을 잡아당긴다)  앞으로!

 

 

  이 책은 1952년 베케트의 나이 47세 때였다. 그때까지 그는 일부 지식인들을 제외하고는  일반인에게 거의 알려지지 않은 작가였다. 그 때 이미 그는 소설 3부작 <몰로이>, <말론 죽다>, <이름붙일 수 없는 것>을 발표한 상태였지만 작품이 지나치게 독창적인 데다가 사생활 역시 극히 폐쇄적이었기 때문에 베일 속의 인물이었을 뿐이다.(그 점은 1969년 노벨상을 수상했을 때 시상식에 나타나지 않고 일체의 인터뷰를 거절한 채 생을 마감하기까지 일관된 그의 생활자세에서도 드러난다)

 

<고도>는 1953년 1월 5일 파리의 바빌론 소극장에서 초연한다. 이 작품이 파리 연극계의 주목을 받게되자 극히 일부 지식인들과 평론가들 사이에서만 알려져 있던 베케트는 갑자기 저명인사가 된다. 바빌론 극장은 재정문제로 문을 닫을 위기에 처해 있어서 블랭(연출자. 포조 역할 연기)에게 마지막 기대를 걸고 있는 상태였다. 그런 어려운 여건에서 막을 올린 <고도>는 기껏해야 삼주일에서 한달 정도 공연될 계획이었다. 그런데 아누이가 <피가로>紙에 <광대릉에 의해 공연된 파스칼의 명상록>이라는 評을 쓰자 관객이 몰려들기 시작했고, 파리에서만 300회 이상 장기공연을 기록했고, 50여개 나라의 언어로 번역, 공연되면서 연극계의 혁신적인 충격을 가져왔다.

  영국의 연극학자 '마틴 에슬린'이  '부조리 연극'이라고 지칭하면서 이 특이한 연극은 반연극 또는 부조리 연극이라는 새로운 연극운동으 방향을 제시하게 된다.

  작품의 내용과  형식이 매우 새로워 관객들은 충격속에서 그 의미를 파악하려고 애썼으며 신문과 방송은 작가와의 인터뷰를 통하여 그 해답을 찾으려고 했으나 허사였다.

  미국에서의 초연 때 연출자 알랭 슈나이더가 베케트에게 고도가 누구이며, 무엇을 의미하느냐고 묻자 베케트는 <내가 그걸 알았더라면 작품 속에 썼을 것>이라고 대답했다는 이야기는 유명한 일화로 남아있다. 작가 자신이 그와같은 대답을 한 이상 관객들 사이의 물음운 끊이지 않았고, 그 해답 역시 물을 만큼이나 무수히 쏟아져 나왔다. 고도는 神이다. 자유다. 빵이다. 희망이다......

  고도는  Godot 가 영어의 God과 프랑스어의 Dieu를 하나로 압축한 합성어의 약자라는 해석도 있다. 어쨌건 고도에 대한 정의는 구원을 갈망하는 관객 각자에게 맡겨진 셈이다.

 

 

2005. 12.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