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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61. 싯달타, 헤르만 헤세, 청무, 2003

햇살처럼-이명우 2015. 5. 18. 08:52

461. 싯달타, 헤르만 헤세, 청무, 2003

고오뷘다, 교답마, 카마라, 카마스와마(상인)


옴은 활, 화살

범천은 화살의 과녁

기어코 맞춰라, 그 과녁을.


싯달타의 앞에는 하나의 목표가, 오로지 단 하나의 목표가 있었다. 그것은 무위로 돌아가는 것이었다. 자기 자신에게 없어지는 것, 이미 내가 아닌 것, 무위로 된 마음으로 안식을 찾아내는 것, 나를 무위하게 만든 사색 속에서 세계의 경이로 하여금 가슴을 열게 하는 것, 그것이 그의 목표였다. 일체의 자아가 극복되어 죽어 없어지면, 마음속의 잡다한 집착과 충동이 침묵하면, 그때야말로 궁극의 것이, 이미 자아가 아닌 본질의 심연에 있던 것이, 그 커다란 비밀이 눈을 뜰 것이리라.


"명상이란 무엇인가. 육신에서의 이탈이 도대체 무엇인가. 단식이 무엇인가. 그것은 자아에의 도피, 나라는 것의 고뇌에서 잠시의 도피, 고통과 인생의 무의미에 대한 잠시의 마취에 지나지 않는거야. 그런 도피는, 잠시의 마취같은 거야. 소몰이군 쯤이라도 목로집에서 몇 잔의 대포나 야자즙을 마실 때 얻을 수 있는거지. 그래서 소몰이꾼은 자기를 잊고, 생활의 고통을 잊고, 잠시 동안의 마취를 즐기는거지. 너나 내가 오랜 수행의 끝에 육체의 나약함에서 탈출하여 무아 속에 머무를 때를 얻어 내는 것을, 그 작자들은 몇 잔의 술에 곯아 떨어져서 찾아낸단 말이야. 그렇지 않은가. 보오뷘다 여."


우리들이 배움이라고 말하는 건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 것이라고 나는 믿고 있지. 친구여, 단 한가지의 앎이 있을 뿐이지. 그것은 어느 곳에나 있지. 그것은 참된 자아야. 그것은 내 속에, 네 속에, 모든 속에 있어. 그래서 나는 이 앎을 알려고 탐하는 것, 배우려고 하는 것보다 더 나쁜 것은 없다고 믿기 시작한거야. 우리들에게 신성하다고 생각한 모든 것 중에 대관절 또 무엇이 남아있단 말인가.


교답마.

그는 주의깊게 교답마의 머리와 그의 어깨와, 다리와, 조용히 내려쳐진 손을 쳐다보는 것이었다. 그 손의 손가락 마디마디가 바로 가르침이며, 진리를 말하는 것이며, 호흡하고, 풍기고, 빛을 발하고 있다고 생각되는 것이었다.


고오뷘다여......지금 너는 한 사람 몫의 남자로서 스스로의 힘으로 너의 길을 택한 것이다. 그 길을 최후까지 걸어가길. 오오. 나의 친구여! 네가 해달을 찾아내길 진정으로 바라네.


한 사람의 인간을 본 것이다. 그 앞에서는 머리를 숙이면 안될것 같은 유일한 사람을 본 것이라고 싯달타는 생각했다. 다른 사람 앞에서 이미 어떤 다른 사람 앞에서도 결코 머리를 숙이지 않으리라. 어떤 사람에 대해서도 머리를 숙이지 않으리라. 이 사랆의 가르침마저 자기를 유혹하지 못했는데 하물며 다른 누구의 가르침이 나를 구할 수 있겠는가 말이다. 불타는 자기로부터 무언가 빼앗아 갔다고 신달타는 생각했다. 내게서 무엇인가 빼앗아 갔다고는 하지마는, 그 이상의 것을 내게 준것이다. 불타는 내게서 내 친구를 앗아갔다......하나 불타는 나에게 싯달타를, 자기 자신을 안겨준 것이다.


삼라만상은 되돌아오는 거지요!


카마라

"사문이나 바라문 중에서, 자기 학식이나 신앙을, 그리고 깊은 지혜 같은 것을 빼앗기리라고 두려워하는 사람이 있겠습니까. 그런 것은 그 사람 자신이 것으로써, 그 사람이 주고 싶은 사람에게 안겨줄 수 있듯이 카마라의 사랑도 역시 그와 같은 겁니다. 꼭 같은 이치지요.

  카마라의 입은 아름답고 붉지만, 카마라의 마음을 거슬리어 가면서까지 키스를 한다고 해보십시오. 그 때야말로 한방울의 단맛도 볼 수 없을 테니까요. 한 없는 달콤함을 안겨줄 수 있는 입술인데도 말입니다. 당신은 이해가 빠른 사람이니까 싯달타여, 이런 것 쯤은 기억해두는 것이 좋을 겁니다. 사랑이란 애원으로 얻을 수도 있고, 돈으로 살수도 있고, 선물로 얻을 수도, 뒷골목에서 거두어 들일수도 있는 것이지만, 강제로 빼앗지는 못하는 겁니다."


카마스와미

"누구나 자기가 가진 것을 주게 마련입니다. 무인은 힘을, 상인은 상품을, 스승은 가르침을, 농부는 쌀을, 어부는 생선을 주는 것입니다."


"저는 깊은 사색에 빠질 수 있습니다. 기다릴 수 있습니다."


단식이 무슨 소용이오?


"크게 도움이 됩니다. 먹을 것이 없을 때, 단식이야말로 인간이 할 수 있는 가장 현명한 방법입니다.이를테면 싯달타가 단식하는 것을 배워두지 않았다면, 어제 같은 날 당장에 일자리를 구하지않고는 배겨내지 못했을 겁니다. 주인장께서든, 다른 곳에서든 배고픈 사람이 어디 염치가 있겠습니까. 그러나 싯달타는 조용히 기다릴 수 있었습니다. 그는 초조를 모릅니다......"


하루에 푸짐한 밥상을 제공해 주었으나 싯달타는 하루 한 끼만 식사를 했다. 그리고 술과 고기를 먹지 않았다...... 싯달타는 남의 말을 많이 들었으나 자기는 말을 삼가했다. 


대다수의 인간이란 지는 낙엽과 흡사한거요. 바람에 휘날려 공중에서 맴돌다가 이리저리 굴러 떨어지는 법이지요. 소수이지만 별과 닮은 사람이 따로 없는 것은 아니오. 이런 사람은 고정된 궤도를 나아가면서 어떤 바람에도 꿈쩍하지 않지요. 자기 자신 속에 어떤 법칙과 궤도를 지니고 있으니까요.


봐즈디봐는  주의 깊게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다. 출신과 어린시절, 일체의 학습, 일체의 탐구, 모든 기쁨과 괴로움을, 모든 것을 경청하고, 마음 속에 받아들이는 것이었다. 이것은 이 뱃사공의 미덕 중의 가장 좋은 미덕의 하나였다. 즉 그는 경청하는 것을 터득하고 있었던 것이다. 봐즈디봐는 한 마디도 하지 않았지만, 싯달타는 상대편이 자기의 말을, 가슴을 열어 헤쳐놓고 조용히 받아들이고 있다는 것을 또 한마디도 빠뜨리지 않을 뿐만 아니라, 조급하게 구는 법이 없이 찬사나 비난도 하지 않고, 다만 경청하고 있다는 것을 배운다는 것은 그러한 상대편의 마음 속에 자기의 생애를, 탐구를, 고뇌를, 침잠시킨다는 것은 얼마나 행복한 일인가, 고 싯달타는 생각했다.


나는 학자가 아니오. 말하는 것도, 생각하는 것도 서투른 사람이오. 나는 다만 귀를 기울이는 법을 알 뿐이며, 나쁜 마음을 갖지 않을 따름이오. 그 외에는 아무것도 배운게 없답니다. 그것을 말로 가르칠 수 있다면야 내가 학자가 되었잖겠소. 허지만 난 한낱 뱃사공일 따름이오.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란 사람들을 배로 건네주는 일이오. 많은 사람을 아마 몇 천명을 건네 주었을거요. 그들로서는 이 강이 여행가는 길의 장애물 밖에 되는 않았던거요. 그들은 돈을 벌기위해, 결혼 때문에, 순례를 하기 위해 여행하는 것이었소. 그런 그들에게 이 강은 딱 질색이었을 거요. 사공은 이 장애물 저편으로 그들을 빨리 건네주기 위해 이곳에 있는거요. 허나 수천명 중의 몇 사람만은 이 강이 장애물이 아니란 걸 알고 있었지요. 그네들은 물의 소리를 들을 줄 알았지요. 강물이 내게 신성한 것 처럼, 그이들에게도 또한 신성한 것이었다오.


아들

자식이 행복과 평화를 주는 것이 아니라 괴로움과 걱정을 가져다 주는 것이라고 깨닫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는 자식을 사랑했다. 자식이 없는 행복과 기쁨보다는, 사랑의 괴로움과 걱정이 오히려 좋았던 것이다. 


친구여! 강이 그것을 비웃고 있는 소릴 듣는게 좋을거요! 당신은 자기가 저지른 어리석은 짓을 자식에게 되풀이 시키지 않겠다고 정말로 생각하고 있소. 도대체 윤회에 대해서 자식을 지킬 수 있다고 생각하고 있소. 도대체 어떻게? 가르침으로써, 기도로써, 훈계로써 말이오. 그 말을 당신이 언젠가 여기서, 이 장소에서 내게 말해 들려준, 바라문의 아들 싯달타의 그 교훈에 넘친 이야기를, 당신은 벌써 있어버렸단 말이오. 사문 싯달타를 윤회에 대해, 죄에 대해, 탐욕에 대해, 어리석음에 대해 지킨 건 누구라 하였지요. 그의 아버지의 신앙이, 아버지의 훈계가, 그 자신의 자식이, 그 자신의 구도가, 그를 지킬 수 잇었다고 생각하고 있소. 스스로가 이 삶을 누리고, 스스로가 살면서 다치고, 스스로가 죄를 짊어지고 스스로가 쓰디쓴 즙을 마시고, 스스로가 자기의 길을 찾아가는데에 대해, 어떤 아버지가, 어떤 스승이 그를 지킬 수가 있단 말이오. 이 길이 누구에게는 면제된다고 당신은 믿고 있소. 당신이 자식을 사랑한다고해서, 자식을 위해 괴로움과 고통과 실망을 면제시켜 주고 싶은 생각이 있다고해서, 그걸 그렇게 해 줄 수 있는걸로 아시오. 가령 당신이 열 번 걔를 위해서 죽는다고 해도, 그것으로 걔 운명의 가장 적은 부분마저도, 덜어주지는 못할거요.


지금 그는 이전과는 다른 안목으로 인간을 보게끔 되었다. 전처럼 현명하게 내려다보는 것이 아니고 보다 따스하고, 강한 관심과 동정을 가지고 세상을 보게 되었다.


싯달타는 조용히 흐르는 물 속에 자기의 얼굴이 비치는 것을 그는 보았다. .....그 얼굴은 .....바라문인 아버지를 닮고 있었다. 그가 옛날 청년시절일 무렵 고행자의 뒤를 따르게 해 달라고 아버지를 조르던 일, 아버기와 헤어진 후로는 두 번 다시 돌아가지 않았던 일을 생각해 내었다. 지금 그가 자식으로 인하여 괴로와 하고 있는 것처럼 아버지도 그를 위해 얼마나 많은 괴로움을 겪었을 것인가.


당신은 수도가 너무 지나쳤다고 말할 수 있을지 모르오. 너무 파고 들어 구하면 찾아내는 것에 이르지 못하지요.


그 사람의 눈이 파고들며 구하는 것만 생각하여 그 목표에 얽매여졌기 때문에 아무것도 찾아낼 수가 없으며 아무것도 마음 속으로 받아들일 수가 없게 되기 쉽다는 겁니다. 파고들어 구한다는 것은 목표를 갖는 다는 것 아니겠소. 이것에 반해 찾아낸다는 것은 자유로운 것, 마음을 열고 있다는 것, 목표를 갖지 않는다는 것이 되겠지요. 스님이여, 당신은 아마 실제 파고들어 구하는 그런 사람으로 여겨집니다만 스님은 목표를 쫒기에 급급하여 눈앞에 있는 여러 일을 보지 못하고 있는 것 같으니까요.


지식은 전할 수가 있는 거지만 앎이란 전할 수가 없어. 지혜는 찾아낼 수는 있지. 지혜를 살릴 수는 있어. 지혜에 의지할 수는 있어. 지혜로 기적을 행할 수 있어. 허나 지혜를 말로 가르칠 수는 없다는거야......


나는 하나의 사상을 찾아내었지. 고오뷘다, 그대는 이것마저도 농담, 아니면 잠꼬대 같은 소리로 들릴지 모르지만, 이것만은 나의 최고의 사상이지. 그것은 '진리에 있어서 그 반대의 것도 역시 진실이다.'라는 것이네. 즉, 하나의 진리는 항상 일면의 경우만이 말로 표현되는 거지. 사상으로서 생각할 수 있고, 언어로써 말해질 수 있는 것 모두가 그 일면에 지나지 않는 반쪽 뿐이야. 모든 것은 전체와 끝맺음이 일치 하지 않아 통일을 잃고 있어. 


내나 자네나 모두 죄인이 아닌가. 현재 그렇다는 것이네. 허나 이 죄많은 이 사람도 언젠가는 또 범(梵)이 될 것일세. 언젠가는 열반으로도 들어갈 수 있을거고 불타로도 될테지. 그런데 이 언젠가 라는게 미혹이고 설마에 지나지 않는거지.


이제 이 이상 그것에 대해 말을 낭비 않기로 함세. 대체로 말이란 그 속에 간직한 뜻을 그러치기 쉬운거지. 한 번 입밖으로 내기만하면 그것을은 언제나 조금씩 달라지게 마련이고, 어느정도 몰래 바뀌어 지는 것이며, 어느 정도 어리석어지게 되지.


그건 물체야. 물체를 사람은 사랑할 수 있어. 허나 말은 사랑할 수가 없지. 그러므로 가르침은 나와 아무런 인연이 없지. 가르침은 딱딱함도, 부드러움도, 빛깔도, 냄새도, 각도, 맛도, 가지고 있지 않아. 가르침은 말 밖에 가진게 없어. 아마 자네가 평화를 찾아내는 것 방해하는 것도 그것일걸세. 틀림없이 말이 많은 까닭이야. 해탈이고, 덕이고, 윤회고, 열반이고가 단지 언어에 불과하기 때문이지. 고오뷘다, 열반일 것 같은 형체는 존재하지 않는거야. 열반이란 말이 존재할 뿐이지. 


알고 있어, 고오뷘다. 정신을 차리는 것이 좋아. 그 점으로 하여 우리들은 의견의 덤불 속에, 이론을 위한 논쟁 속에 휘말려 들고 있단 말이야. 사랑에 대해서 나의 이론이 교답마의 말씀과 모순되어 있다는 것, 일견 모순되어 있다는 걸 부정하지는 않아. 그런 이유로하여 나는 언어 자체를 심히 의심하고 있지. 이 모순이란 것도 하나의 착각이라는 걸 알고 있기 때문에 말이야......

그 분의 행위와 생활은 그분의 설교보다 중요한 것이며, 그 분의 손짓 하나는 의견보다 중요하다는 걸 우리는 알아야 되지 않을까. 설교나 사색이 아닌 그 행위와 생활 속에서 오히려 나는 그 분의 위대함을 발견하고 있다네.


2012. 5. 2 수요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