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99. 열국지 5. 동호董狐의 무서운 붓, 풍몽룡, 김구용 옮김, 솔, 2001
숙첨은 정나라를 구하기 위해 진晉 문공 앞에서 조용히 아뢴다.
"......신의 유일한 소원은 이제 우리 정나라를 위기로부터 건지는 것 뿐입니다. 현실을 보고 미래를 맞추는 것이 지혜며, 전심전력을 기울여 국가를 돕는 것이 충성이며, 역경에 처해 있을지라도 그 곤란을 피하지 않는 것은 용기이며, 제 몸을 죽여 나라를 구하는 것은 인덕仁德 입니다. 신에게 이러한 인,지, 충,용이 다 겸비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진晉 나라 국법은 이런 사람을 삶아 죽이기로 되어 있습니까?"
숙첨은 말을 마치자 끓는 가마솥 앞으로 달려갔다. 그리고는 가마솥에 몸을 던지려는 자세를 취하고서 모든 사람을 돌아보고 말했다.
"이 후 임금을 섬기는 사람은 언제든지 누구나 이 숙첨을 본받아야 할지니라."
진晉 문공(공자 중이) 62세에 즉위, 68세에 사망. 즉위한 지 8년.
진晉 나라 중군대부 선진(아들 신차거)
"신 중군대부 선진은 삼가 아뢰나이다. 전날 신은 상감께 무례한 짓을(효산 전투에서 어렵게 포로로 잡은 진秦 나라 장수 맹명, 서걸술 등을 죽이지 않고 쉽게 풀어주었다는 진晉 양공의 말을 듣고 진 양공의 얼굴에 침을 뱉은 일) 저질렀으나 상감께선 신을 죽이지 않고 다시 중임을 맡기셨습니다. 이번 싸움에서 다행이 이겼으니 장차 상감께선 신에게 상을 내리실 것입니다. 신이 이번에 돌아가서 상을 안받는다면 이는 공훈이 있어도 상이 없는 결과가 될 것이며, 만일 상을 받는다면 이는 무례한 짓을 해도 상을 받을 수 있다는 결과가 됩니다. 공이 있는데도 상이 없다면 공훈을 세우라고 아랫 사람에게 어떻게 권할 수 있으며, 무례한 짓을 해도 상을 받을 수 있다면 어떻게 아랫사람에게 죄를 벌할 수 있겠습니까? 공과 죄의 분별이 분명하지 못하면 무엇으로 국가를 다스릴 수 있겠습니까. 신은 지금 책나라 군사에게로 달려갑니다. 상감께서 신을 죽이지 않으시는지라 신은 책나라 군사의 손을 빌려 죽음을 당할 작정입니다. 신의 자식 차거는 장수로써 지략이 있습니다. 족히 아비를 대신해서 상감께 충성을 다하리이다. 신 선진은 죽음을 앞에 두고 상감께 영결을 고하나이다."
초楚 장왕은 투월초가(초나라 영윤벼슬) 일으킨 반란을 진압하고 잔치를 벌였다. 태평연太平宴이라 했다. 초楚 장왕에게는 미모의 애첩 허희許姬가 있었는데 장왕의 명으로 술을 모두 따라 권한다. 허희가 대부들에게 일일이 술을 따르는데 갑자기 바람이 불어와 촛불들이 한 꺼번에 다 꺼져버렸다. 잔치자리는 지척을 분별할 수 없는 암흑천지로 변했다. 내시들은 불씨를 가지고 오기 전이었다. 이 때 누군가 알 수 없는 한 대부의 억센 손이 허희의 허리를 슬며시 끌어안았다. 어둠 속에서 허희는 대부의 가슴을 밀어냈다. 그러면서 다른 손으로 그 대부가 쓰고 있는 관冠 끈을 잡아 끊었다. 그제야 그 대부는 몹시 놀라 허희를 놓았다. 허희가 관 끈을 손에 쥐고 가서 초 장왕의 귀에 대고 아뢴다.
"첩은 대왕의 명령을 받들어 공경하는 뜻에서 차례로 대부들에게 술을 따랐습니다. 그런데 그 중 무례한 사람이 있어 첩의 몸에 손을 대지 않겠습니까. 첩이 그 사람의 관 끈을 끊어 왔습니다. 속히 불을 밝히도록 명을 내리시고 그 대부가 누구인지 살피십시오."
초 장왕이 황급히 분부한다.
"아직 불을 밝히지 마라. 과인이 오늘 이렇듯 잔치를 베푼 뜻은 모든 경들과 함께 서로 기뻐하기 위해서다. 경들은 우선 그 거추장스러운 관 끈부터 이리제히 끊어버리고 진탕 마시라. 만일 관 끈을 끊지 않는자가 있다면 그는 과인과 함께 즐기기를 거역하는 자이리라."
이에 문무백관은 일제히 관 끈을 끊었다. 그제야 초 장왕은 불을 밝히게 했다. 이리하여 결국 허희를 끌어안은 자가 누구인지는 아무도 몰랐다.
잔치가 끝나고 내궁으로 들어가니 허희가 "대왕께서는 첩에게 모든 대신들의 술을 따라주게 하시며 대신들에게 공경의 뜻을 보였지만 그럼에도 감히 첩의 몸에 손을 댄 자가 있습니다. 그러나 왕께서는 그 무례한 자를 잡아내려 하지 않으셨습니다. 이러고서야 어떻게 상하의 예의를 밝히며 남녀의 구별을 바로 잡겠습니까?" 물었다.
초 장왕이 웃으며 대답한다.
"이는 부녀자의 알 바 아니다. 자고로 임금과 신하가 한 자리에서 술을 마신 때엔, 서로 석잔(三杯) 이상을 못 마시는 법이다. 그것도 낮에만 마시고 밤엔 못 마시게 되어 있다. 그런데 과인은 오늘 모든 신하와 함께 취하도록 마셨고, 또 촛불까지 밝히고서 마셨다. 누구나 취하면 탈선하는 것이 인정이다. 만일 그 대부를 찾아내어 처벌하고 그대의 절개를 표장하면서 그 사람의 마음을 괴롭힌다면, 모든 신하의 흥취가 어찌 되었겠는가? 그렇게 되면 과인이 오늘 잔치를 차린 의미가 없지 않느냐."
후세 사람들은 그 잔치를 절영회絶瓔會 라고 했다.
초 장왕(B.C 613~591재위) 초 목왕의 세자이자 초 나라 22대 군주로 본명은 여旅, 즉위 후 3년 까지는 약오씨若敖氏 세력의 전횡 때문에 통치력을 제대로 발휘하지 못했지만 즉위 3년 째인 B.C 610년에 발생한 대기근과 외세의 협력으로 정권 장악 함.
B.C 605년 초 나라 대족이자 왕권의 최대 장애였던 약오씨 세력을 꺾어 완전히 왕권 확보. 제齊 나라, 진晉 나라에 이어 중원 재패, 세 번째 패권국가가 됨
2013. 1.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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