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24. 역사의 연구1, 토인비, 삼성출판사, 1989
차례
1편 서론
1. 역사연구의 단위
2. 문명의 비교연구
3. 사회의 비교 가능성
2편 문명의 발생
1. 문제와 그 비판
2. 도전과 응전
3. 역경과 효능
4. 환경의 도전
5. 중용
3편 문명의 성장
1. 발육정지 문명
2. 문명의 성장의 본질
3. 성장의 분석
4. 성장을 통한 분화
4편 문명의 쇠퇴
1. 문제의 성질
2. 결정론적 해답
3. 환경을 지배하는 힘의 상실
4. 자기 결정의 실패
5편 문명의 해체
1. 해체의 성질
2. 사회체의 분열
3. 혼의 분열
4. 해체기의 사회와 개인과의 관계
5. 해체의 리듬
6. 해체에 의한 표준화
해제 - 노명식
과거의 이해는 현대의 이해를 바탕으로 함으로써 비로소 가능하다. 토인비의 역사학은 고전시대를 현대세계에서 보고, 현대세계를 고전시대에서 보는 사안(史眼)에서 출발한다. 이것을 그는 "쌍안적(雙眼的)"이라고 칭하고 있다. 그의 "쌍안적" 사안은, 고전시대와 현대를 따로 떼어서 보지않고 패러럴(Parallel)로 보는 사안이었다.
토인비는 문명의 상장은 자기결정의 능력의 증대이고, 쇠퇴는 그 능력의 상실이라고 본다. 자기 결정의 능력은 창조적 인물들과 그들을 모방하는 민중의 자발적이고 자주적인 생각과 행위에서 나오는 것이기 때문에 성장하는 사회의 특성은 강제와 획일이 아니라 자유와 분화(分化)이다. 그리고 문명으로 발상은 하였으나 그 이상 새 도전에 응전하지 못한 5개의 문명이 있는데, 그것을 토인비는 '저지당한 문명'이라고 한다. 그들이 성장하지 못한 이유는 '계급제도'와 '전문화'라는 비분화(非分化)에 빠졌기 때문이다.
'저지당하지 않고' 완전히 성장한 21개 문명 가운데서 현재 살아남은 7개 문명 중 '서구 문명' 이외에는 모두 거의 다 죽어가고 있다고 한다. 말을 바꾸면, 토인비의 21개 문명 중 20개 문명은 해체의 단계를 거쳐서 망하였거나, 완전히 멸망하지는 않았더라도 쇠퇴의 단계를 거처셔 해체기에 들어가 있다는 말이다.(......)
모든 문명의 쇠퇴의 원인은 외적인 것이 아니라 내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자기결정의 능력을 상실하게 될 때 그 문명 안에는 조화가 깨어지기 시작하고, 삼자택일이 요구된다. 낡은 제도와 새 사회적 세력과의 사이의 원만한 조절이냐, 조절이 잘 안되는 결과로 일어나는 혁명이냐, 혹은 조절도 혁명도 없이 그냥 비뚤어져가는 이상(異常)이냐. 조절에 의한 조화의 회복 불가능한 사회에서는 깨어진 조화의 상태가 계속되면서, 이른바 '혼란시기'로 들어간다. '혼란시기'의 종점은 '세계국가'이다.
문명의 쇠망론에 있어 간과해서는 안될 것은 창조적 소수자의 창조성 상실의 원인은 창조성에 대한 민중의 모방이 무상(無常)과 자아(自我)와 무상한 제도를 우상화하는 형태를 취하는데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거기서부터 또 무상한 기술도 우상화하게 된다. 이러한 우상화의 결과는 새로운 문제의식에 의한 창조적 해결방법의 발견을 방해하고, 전일에 성취해 놓은 것에 만족하고 거기 기대어 낮잠만 자게 만든다. 그러나 이러한 우상화는 소극적 결과에 불과하다. 적극적 재앙의 원인은 물리적 힘에 대한 자신에서부터 우러나오는 만족과 교만이다. 이 교만이 가장 전형적인 형태가 군국주의적 태도에 잘 나타난다. 군국주의적 우기와 무용이야말로 그것을 잘못 사용한 자들에게 치명적 타격을 준다. 그러나 군국주의적 타격보다 더 치명적인 것은 승리 - 그 승리가 군사적인 것이건 정신적 투쟁에 의한 것이건 - 에 수반하는 '승리의 도취'이다.
역사의 연구 1, 토인비
이상 조사한 결과 지금 우리는 19개 사회를 찾아냈다. 그 대부분은 하나 혹은 그 이상의 다른 사회와 부자관계에 있다. 그 19개 사회를 열거하면 다음과 같다. 서구 사회, 정교 사회, 이란 사회, 아랍 사회(이란, 아랍사회는 현재 이슬람사회로 통합되어 있다), 힌두 사회, 극동 사회, 헬라스 사회, 시리아 사회, 인도 사회, 중국고대 사회, 미노스 사회, 수메르 사회, 히타이트 사회, 바빌로니아 사회, 이집트 사회, 안데스 사회, 멕시코 사회, 유카탄 사회, 마야 사회.
'고대+중세+근세'의 공식은 틀린다. 그것은 '헬라스 사회+ 서구 사회(중세+근세)'로 고쳐야 한다.
서구 제1기(암흑시대) 675~1075, 서구 제2기(중세) 1075~1475, 서구 제3기(근세) 1475~1875, 서구 제4기(후.근세) 1875~
그러나 이런 시대구분의 문제도 우리의 중심 문제에서 벗어난 것이다. 우리의 중심 문제는 헬라스 사회이 역사와 서구 사회의 역사 - 좋으시다면 '고대'와 '근세'라고 해도 좋다.- 를 역사 자체와 동일시하는 것은 서구인의 비좁은 지방근성에 불과한 것이고 건방진 태도라는 것이다. 그것은 마치 지리학자가 세계지리라는 서명의 책을 저술했음에도 불구하고 내용을 검토한, 즉 지중해와 유럽에 관해서만 써 있더라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미메시스(mimesis) 그리스어로 모방, 본 뜻은 다른 사람의 말을 그대로 모방하여 그 사람을 여실히 표현시키려는 수사법임.
아담과 하와의 성교는 사회적 창조의 행위이고, 그 결과 두 아들이 생겼다. 아벨은 양치는 목자이고, 카인은 밭 가는 농부였다.
루이지에나 - 당시 프랑스와 루이14세의 이름을 따 붙임.
절름발이 대장장이 헤파이스토스와 장님 시인 호메로스
문명은 아주 살기 어려운 환경에서 발생하는 것이고, 살기 좋은 환경에서는 발생하지 않는다. '도전이 클수록 자극도 크다.'
다섯 유형의 자극 - 살기 어려운 땅, 새로운 토지, 타격, 압력, 박해
유목생활은 실로 인간의 기술의 승리이다. 목자는 자신이 먹을 수 없는 거친 풀을 길들인 동물의 젖과 고기로 변형시켜서 그 생명을 유지한다. 그리고 목자는 가축의 사료를 빈약하고 메마른 초원지대의 자연식물에서 철이 맞건 안맞건 얻기 위해서는 그 생활과 행동을 정밀한 정확성을 갖고 계절의 시간표에 맞추지 않으면 안된다. 사실 유목생활의 '역작'은 무섭게 높은 수준의 성격과 행동을 요구하는 것이므로, 유목민이 받지 않으면 안되었던 '응보'는 본질적으로 에스키모의 그것과 동일하다. 유목민이 정복하는데 성공한 그 무서운 환경은 어느 새 유목민을 환경의 노예로 만들었다. 유목민은 에스키모와 마찬가지로 해마다 되풀이 하는 기후와 식물의 포로가 되어 초원지대의 주도권을 획득하는 사이에 널리 전 세계 주도권을 잃고 말았다.
오스만 왕조의 노예세대
나는 터키인의 이 제도로 말미암아 그들을 부럽게 생각하였따. 비범한 재주를 가진 사람을 만나게 되면 마치 값진 진주라도 발견한 것처럼 항상 기뻐하고 즐거워하는 것이 터키인의 일상 습성이다. 그리고 그들은 그 사람에게 있는 모든 천분을 개발시키는데 있어서 할 수 있는 모든 노력과 걱정을 아끼지 않는다. 특히 군사적 재능을 인색하게 될 때 더욱 그렇다. 우리 서양의 풍속흔 그 얼마나 다른가! 서양에서는 우리가 좋은 개나 매나 말을 갖게되면 크게 기뻐하며, 이런 종류의 동물이 달할 수 있는 완벽한 수준에 까지 그 동물을 훈련시키는 노력을 아끼지 않는다. 그러나 사람의 경우에 있어서는 - 우리가 용하게 어떤 특출한 천재적 인간을 만났더라도 - 그런 노력을 하지않고 그의 교육을 특별히 우리의 임무로 생각하지 않는다. 서수인은 잘 조련된 말, 개, 매에서 여러가지 즐거움과 대접을 받는데 반하여, 터키인은 교육에 의해 그 품성이 함양된사람으로부터, 인간은 어떤 동물보다 뛰어난 위대한 우월성과 탁월성이 있다는 사실로써 얻어지는 훌륭한 보수를 받는다. - 오기에르 기스랑드 부스벡크 -
이중(二重)의 노력이 필요하다. 하나는 새로운 발명을 행하는 부류의 사람들의 노력이고, 또 하나는 그것을 채용하여 거기에 적응하려는 나머지 모든 사람의 노력이다. 이러한 창의의 행위와 순응의 태도가 한 사회안에 들 다 공존하게 되는 순간 그 사회는 문명이라 불릴 수 있게 된다. 실제 문제에서는 둘째 조건이 첫째 조건보다 확보하기가 더 어렵다. 미개사회가 가지지 못했던 불가결의 요소는 탁월한 인격이 아니었다.(자연은 언제 어느 곳에서든지 이 일정한 수의 교묘한 걸작들을 만들어 내지 않았따고 부정할 이유는 없는 것 같다.) 그 사회가 가지지 못하였던 요소는 오히려 이런 빼어난 개인들이 그 우월성을 발휘할 기회와 그 밖의 사람들이 그들의 지도를 따라가려는 생각이었던 것 같다.
맘루크 - 아랍어로 '소유물'이란 뜻, 살라딘이 창건한 아이유브 왕조의 노예 병사
비 창조적 대중으로 하여금 실제로 창조적 소수자의 지도를 따라가게 하는 문제의 해결에는 현실적 해결과 이상적 해결의 두 가지 방법이 있는 것 같다. 하나는 훈련에 의하고, 또 하나는 신비주의적 방법에 의한다.(......) 첫째 방법은 비인격적인 관습으로 구성되는 도덕적 습성을 가르치는 것이고, 둘째 방법은 타인의 인격을 모방하여 그 인격과 정신적으로 화합하여 거의 동일한 인격이 되고 싶은 마음을 일으키게 하는 것이다.
플라톤은 범용한 이유를 동굴안의 죄수들에게 비유하고 있는데, 죄수들은 빛을 등지고 서서 배우에서 움직이는 실제의 그림자가 안 벽에 붙이는 것을 보고 있다. 죄수들은 동굴을 안쪽 벽에 비치는 그림자를 궁극적 실제라고 확신한다. 왜냐하면 그들이 여태껏 볼 수 있었던 유일 한 것은 그 것 뿐이기 때문이다. 이때 플라톤은 한 죄수가 갑자기 석방되어 돌아 되돌아와서 빛 쪽을 향하여 밖으로 걸어 나오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고 가정한다. 시각의 방향이 갑자기 달라진 첫 결과는 석방되는 죄수의 눈이 따갑고 당황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잠시 뿐이다 그에게 시력이 회복됨에 따라 점차 그 두 눈은 실제세계 본체를 그에게 알리게 된다. 거기서 그을 다시 동굴로 데리고 온다면 그런 아까 햇빛으로 말미암아 눈이 따갑고 당황했던 것처럼 이번에는 컴컴한 어둠으로 말미암아 눈이 따갑고 당황하게 된다. 그는 아까 햇빛이 비치는 밖으로 나가게 된 것을 후회하였던 것처럼 이번에는 어둠 속으로 다시 오게 되는 것을 전 보다 더 후회하게 되는데 그 이유는 한 번도 햇빛을 본 일이 없는 동굴 내에 동료들에게 돌아옴으로써 그런 적의(敵意)의 응대를 받을 위험에 놓이게 되기 때문이다.
마호메트가 처음 순전히 종교적 활동을 시작 한 것은 약 15년 간 아라비아의 오아시스들과 북부 아랍의 초원 주변에 점재하는 로마 제국과 시리아 지방 사막항(沙漠港)들과의 사이에 왕래하는 대상 생활로 반(半) 후퇴하였다가 아라비아의 지방적 생활로 복귀한 후의 일이었다. 마호메트의 생애의 둘째 단계 또는 정치적, 종교적 활동의 시기는 이 예언자가 고향의 오아시스 메카(Mecca)에서 이에 대항한 오아시스 야트리브(Yathrib)으로의 후퇴 또는 ‘해지라’ 로서 시작되었다. 그로부터 야트리브는 (예언자의) ‘도시’라는 의미의 ‘메디나’로써 특히 잘 알려지게 되었다. ‘헤지라’는 이슬람교도가 그 해를 이슬람교의 원년으로 삼을 만큼 중대한 사건으로 생각되어 오는데, 이 때에 마호메트는 쫓겨난 망명자처럼 메카를 떠났다. 그런데 7년 후(622~620) 그는 특사로 풀려난 망명객으로서가 아니라 아라비아의 절반의 지배자로서 메카에 복귀하였던 것이다.
마키아벨리(1469~1527)는 1494년 프랑스 샤를 8세가 프랑스군을 거느리고 알프스를 넘어 이탈리아를 유린할 때 25세의 피렌체 시민이었다. 29세 정부 장관에 임명되어 14년 간 근무하다 피렌체의 내정 방향이 갑자기 일전되어, 1512년 장관직을 박탈당하고 이듬해는 토옥과 고문해 시달린다. 다행이 죽음을 면하여 감옥에서 석방되기는 하였으나 피렌체 시골농장에 영구히 추방되었다. 그렇지만 그는 태양과 더불어 일어나서 하루 종일 낮에는 자기에게 강요된 생활방식에 어울리는 단조로운 사회적 활동과 야외활동에 전념한다. 그러나 그것이 그의 하루의 끝은 아니었다.
저녁이 오면 나는 집으로 돌아가서 내 서재에 들어간다. 그 입구에서 나는 진창과 진흙으로 더럽힌 시골 옷을 벗고 예복으로 갈아입는다. 그렇게 단정히 옷을 갈아입고 나는 옛 사람들의 저택에 들어간다. 거기서 나는 극히 자애로운 주인들의 환대를 받는다. 나는 그것만이 나의 하나밖에 없는 진정한 영양이며, 또 내가 그것을 위하여 이 세상에 태어난 음식을 실컷 먹는다.
이런 학문연구와 사색의 시간에 <군주론>은 구상되고 저술되었다. 그 끝장의 유명한 논문 ‘이탈리아를 만족에게서 해방하기 위 한 권고’를 일어보면 마키아벨리가 붓을 들었을 때, 그의 마음에 왕래한 생각이 무엇이었던 가가 명백해진다. 그가 당시의 이탈리아의 중대한 정치문제에 다시 한 번 더 대결하였던 것은 그가 실천의 길에서 빼앗긴 정력을 창조적 사색으로 전환시킴으로써 그 문제의 해결을 지금이라도 도울 수 있을지도 모르리라는 희망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물론 실제로는 <군주론>의 정치적 희망은 완전히 수포로 돌아갔다. 그 책은 저자의 직접 목적은 달성하지 못하였다. 그러나 이것은 <군주론>이 실패하였다는 말은 아니다. 왜냐하면 문필의 수단에 의한 실제 정치의 추구는 마키아벨리가 저녁마다 외따른 농가에서 고인(古人)들의 저택에 들어가서 하고 있었던 일의 본질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마키아벨리는 그의 저서들을 통하여 실제 정치의 잡무에 분망한 피렌체의 한 장관이 할 수 있는 그 어떤 업적보다도 훨씬 더 큰 영향을 세상에 미치는 보다 더 영묘한 차원에서 속계로 복귀할 수 있었다. 마키아벨리는 정신적 번뇌를 극복하는 마술적인 카타르시스의 시간을 통하여 그 실천적 에너지를 근세 서구 정치철학의 씨가 된 일련의 지적 작품들 <군주론>, <로마사론>, <전술론>, <피렌체사>로 전환 시키는데 성공하였다.
단테. 유부녀인데 베아트리체와 사랑에 빠졌고, 베아트리체가 죽고, 유배를 떠나고, 유배에서 풀려날 수 없었지만 그도 그곳에서 <신곡>을 창작하였고, 피렌체 시민권은 잃었지만 세계 시민권을 얻었다.
의회정치라는 영국인의 정치적 발명은 산업주의라는 다음의 사회적 발명의 편리한 배경이 되었다. 행정부가 국민을 대표하는 의회에 대하여 책임을 지는 정치조직이라는 의미의 ‘민주주의’와 공장에 집중된 ‘직공들’에 의한 기계생산 조직이라는 의미의 ‘산업주의’ 등은 현대의 가장 중요한 2대 제도이다.
혁명이 폭력적인 이유는, 혁명은 새로운 생명의 표현을 일시 방해하고 억압한 완고한 구제도에 대한 강력한 새로운 사회적 세력의 지연된 승리이기 때문이다. 그 방해가 오랫동안 계속하면 할수록 출구를 막은 힘의 압력은 더욱 더 커지고, 압력이 커지면 커질수록 갇혀 있던 힘이 드디어 방해물을 통과하게 될 때의 폭발력은 더욱 맹렬해진다.
왕이 신성한 신으로 숭배되려면 반드시 유식한 서기(書記)계급의 존재가 필요한 요건이 된다. 이집트 사회 관료계급의 자기 예찬 <듀아우프의 교훈(The Instruction of Duauf)> 이 책은 이집트시대 혼란기의 작품으로 고관의 자제들과 함께 서기학교에 입학하는 ‘페피’라는 아들을 위한 아버지 ‘듀아우프’가 쓴 교훈글.
나는 보았다. 매 맞는 자를, 매 맞는 자를. 그러니 너는 네 정신을 오로지 책에 쏟아야 한다. 나는 강제 노동에서 해방 된 자를 보았다. 보라 책 보다 나은 것은 하나도 없다...... 끌을 휘두르는 장인, 그는 흙파기 보다도 피곤하다...... 석공은 여러 가지 종류의 굳은 돌을 쪼아야 하고 그것을 다 마치면 그의 팔은 완전 힘을 잃고, 그는 피곤하다...... 밭가는 자, 그는 아무리 일을 해도 보수를 받지 못하고...... 그도 말할 수 없이 피곤하다...... 공장의 직공, 그는 어느 여자보다 불행하다. 그의 허벅다리는 배 위에 올라붙어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한다...... 다시 어부는 어떻게 사는 가를 너에게 말하마. 그는 악어가 우글대는 강에서 일 하고 있지 않느냐? 보라 서기란 직업 외에는 감독자가 없는 직업은 하나도 없다. 그리고 서기가 바로 감독자이다......
로마의 레기온이 마케도니아의 밀집 창병 부대를 압도할 수 있었던 것은 경장보병과 창병과의 결합을 훨씬 더 장기적인 단계로 추진시킬 수 있었기 때문이다. 사실 로마인은 어떤 병사도 마음대로 경장 보병의 역할을 할 수 있고, 중장창병의 역할도 할 수 있고 또 어떤 부대로 적의 면전에서 즉시 이 전술에서 저 전술로 전환 할 수 있는 새로운 형태의 대형과 장비를 발명하였던 것이다.
기원전 745면 티그라드 필레세르의 즉위, 605년 바빌로니아 왕 네부카네드자르가 카르케미시에서 이집트 왕 네코와 싸워 이김. 아시리아가 732년 다마스쿠스, 722년 사마리아, 714년 무사시르, 689년 바빌로니아, 677년 시돈, 671년 멤피스, 663년 테베, 639년 경 수사를 각각 파괴하였다. 612년에 니네베마저 약탈하고 남은 것은 티레와 예루살렘 뿐 이었다.
문명의 성장의 본질은 일종의 비약인데, 이 비약이 도전을 받는 인간으로 하여금 성공적 응전의 평형을 거쳐서 또 새로운 불균형을 낳게 하고, 이 불균형이 있어야 새 도전을 제공하게 한다. 이 도전의 반복은 해체의 개념에도 역시 포함되어있으나 이때에는 응전이 실패한다.
로마의 행정관리들은 헬라스 사회의 세계 국가를 건설하였고, 철학자들은 아카데미 학파(플라톤 학파)와 소요학파(Peripatus, 아리스토텔레스학파), 스토아학파와 정원학파(Garden, 에피쿠로스학파), 그리고 견유학파의 공로와 담장의 자유 및 신 플라톤 학파가 이 세상에는 믿을 수 없는 이상국 등에 의하여 ‘영원한 재산(크레마 에이스 아에이, 투키디데스의 말)을 후세에 남겨 주었다.
알렉산더는 거의 마케도니아 무용(武勇)에 의하여 금방 페르시아에서 탈취한, 그 제국의 통치에 페르시아 인을 협력자로 참여시키기로 결정하였던 것이다. 더구나 그는 철두철미 이 정책을 강력히 추진하였다. 그는 페르시아 고관의 딸을 자기 아내로 삼았고, 부하인 마케도니아 무장들에게는 매수나 위협으로 자기의 본을 따르게 했다. 그리고 휘하인 마케도니아 군대에 페르시아 군을 편입시켰다. 선조 대대의 숙적의 두령으로부터 이처럼 특별한 대우를 받을 수 있는 - 누구나 철저한 패배를 당한 직후에 - 민족이라면 그 민족은 ‘지배자의 자격이 있는 우수한 민족’의 전형적인 믿음을 갖추고 있었을 것이 틀림없다.
지배자가 나라의 종교를 지배한다.
신의 모습을 가리우는 여러 가지 법의 형태.
바빌로니아 사회의 점성학자와 근대 서구사회의 과학자를 노예화 한 것은 수학적 법칙이었고, 불교의 금욕주의자를 사로잡은 것은 심리학적 법칙이었고, 또 헬라스 사회의 철학자를 굴복시킨 것은 사회적 법칙이었다.
진시황의 분서갱유, 시리아를 제국 통일한 칼리프 우마르에 의한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의 900여 년 간의 축적된 장서는 명령에 따라 공중목욕탕에 연료가 되었다.
지배적 소수자들은 한 결 같이 철학을 창작해내고 세계국가를 세우고, 내적 프롤레타리아는 한 결 같이 세계교회에 스스로 구현되기를 목표하는 ‘고등종교’들을 발견하고, 외적 프롤레타리아는 한 결 같이 ‘영웅시대’에 활약하는 전단(戰團)들을 결성한다.
2013년 8월 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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