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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틴 루터 - 한 인간의 운명, 뤼시앵 페브르, 이른비, 2017

햇살처럼-이명우 2018. 1. 4. 09:27

1505-1515년까지 루터에게 중요했던 것은 교회 개혁이 아니라 그 자신이었다. 그의 영혼 구원, 오직 그뿐이었다. 그런데 그 점이 바로 그의 위대함이며 진정한 독창성이 아닌가? 유다의 자재(資材)와 헤로데 왕의 검증된 자재가 결합된 넓고 멋진 건축물(1층 바닥에는 견고한 아리스토텔레스주의 더미가 깔려 있고, 2층에는 아리 스토텔레스가 가르치던 리케움의 튼튼한 기둥들에 신학으로 변한 복음이 잘 자리 잡고 있다) 안에 신도들을 안전하게 보호하고 거주시키는 종교를-공로나 선행의 동반 없이 신부도, 신과 인간의 성스러운 중개자도 이승에서 획득하여 저세상에서 유효한 면벌부도, 신 그 자신에 대면하여 변제하는 사면이라는 불필요한 개입도 없이-중개자 없이 인간을 신 앞에 단독자로 직접 서게 하는 지극히 개인적인 종교로 대체시키는 것. 종교개혁가의 위대한 노력이 먼저 향하는 지점은 바로 그 부분이 아니였던가?


  물론 루터가 이기적으로 자기 묵상에만 빠져 있었던 것은 아니다. 그는 자신을 낙심케 하고 진을 빼게 했으며, 몹시 혐오하기까지 했던 불안을 다른 이들도 느끼고 있다고 생각했다. 루터는 자신의 치료약을 혼자만 위해 쓸 생각은 없었다. 신이 그로 하여금 알아내게 한 비법을 루터는 기쁨의 복음으로 여겨 편지와 강의 주일예배를 통해 모든 사람에게 가르치고 설교한다. 그런데 1515년처럼 1516년에도 삶의 외적 환경은 그를 불확실함과 침묵에서 점점 빠져나오게 한다. 게다가 1515년 4월에는 미스니아(마이센)와 튀링겐의 수도원 지부장에 임명되어 슈타우피츠의 직속 하급자로 근무한다. 그는 직책을 수행하며 세상을 보는 시야와 교제의 폭을 넓힌다. 그런 만큼 1515년으로 추정되는 가장 오래된 설교부터 1516년 6월에서 1517년 2월까지 비 텐베르크 교회 본
당에서 행한 그 유명한 십계명 설교에 이르기까지, 우리가 보존하고 있는 설교 자료들에서 루터 사상의 발전과 영향력의 증대를 추적해볼 수 있다......
  우리에게는 매우 흥미로운 원본들인데, 루터 개인의 신학이 깊이 스며 있으며 인간은 선을 행할 수 없다고 강력히 표명하고 있다. 아우구스티누스 수도회 수도사는 인간의 자유의지와 인간의 다스림 아래 있는 덕행을 설파하는 아리스토텔래스를 맹렬히 공격한다. 그런데 그 아리스토텔레스 뒤에서, 이미 우리는 인문주의자들을 비롯해 에라스무스와 그의 자유의지·도덕주의 그리스도교를 느낀다. 오, 이 신성모독의 언사들은 철학인 동시에 우정의 말들이기도 했다. 그러나 무엇보다 이 원본들은 정확히 그 시기 루터에게 개혁의 의미가 무엇이었는가를 정확히 가르쳐준다.
  그 점에 대해 우리에게 남아 있는 가장 오래된 글들 가운데 하나는 1512년의 흥미로운 한 설교다. 여기서 루터는 이미 중요한 사항에 대한 자기 생각을 완벽하리만치 분명히 표현했다. 루터는 이렇게 썼다.
"그렇습니다, 개혁이 필요합니다. 신부들이 신의 진리에 대한 지식과 경외심을 되찾도록 해주는 데서부터."
  “사람들은 광적으로 집착하는 간음. 음주벽·도박 등 성직자들의 모든 악덕들을 내게 말할 것입니다. 도대체 얼마나 큰 죄악이며 파렴치한 행위들이냐고 말입니다...... 나는 인정합니다. 그 행위들을 규탄해야 합니다. 시정해야 합니다. 그런데,당신이 언급하는 악덕 들은 만인의 눈에 보입니다. 상스럽고 물질적이며 우리 모두의 감각에 느껴집니다. 그러므로 정신을 어지럽합니다...... 아, 그 악, 더할 나위 없이 유해하고 끔찍하며 치명적인 전염병. 한편 진리의 말씀에 조직적으로 침묵하거나 그 말씀을 변조하고 있습니다. 이 악은 상스럽거나 물질적이지 않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알아채지 못하고, 보고도 충격을 받지 않으며
두려움을 느끼지 못합니다.”
  그런데 너무도 이른 이 시기에 이미 이후의 루터가 자주 힘주어 표현하게 되는 감정들이 표출되고 있다.
  "오늘날 진리의 말씀을 정확히 설교하고 해석하는 데서의 소홀함 보다, 순결함을 어기는 죄, 기도의 태만, 미사 전문을 낭독할 때 범하는 잘못이 더 적다고 생각하는 신부들이 과연 얼마나 있다고 생각합니까?...... 그런데 한 신부가 범할 수 있는 유일한 죄는 진리의 말씀을 거스르는 일입니다."
  이 인용은 물론 길다. 그러나 루터의 억제된 격함과 상상력을 자극하는 과격함을 보여주며, 어조와 특징에서 이미 너무도 선명한 루터적인 이 문구를 어찌 다시 옮겨 적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를 순결하게 만드세요. 착하게 만드세요. 박식하게 만드세요. 그에게 자신의 사제직의 수입을 늘리게 하세요. 교회를 세우게 하세요. 교회의 재산을 열 배로 늘리게 하세요. 만일 당신이 그러고 싶기까지 한다면 그에게 기적을 행하게 하세요. 죽은 자를 되살아나게 하세요. 사탄들을 몰아내게 하세요. 무슨 상관입니까? 대중에게 진리의 말씀을 설교함으로써 만군의 주를 예고하는 천사와 신의 예고자가 되는 그 사람만이 진정한 신부, 진정한목자가 될 것입니다!"
요약해보자 성직자의 개혁인가? 그럴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중요한 건 종교 개혁밖에 없다.
  이제 십계명에 대한 설교들을 참조해보자. 확실히 우리는 거기에서 성직자들의 생활태도를 비판하는 대목을 많이 찾아냈다. 그 생활태도는, 옛날 자유로운 설교자들의 대담한 말과 노골적이고 거친 말씨를 전혀 모르는 현대인들에게만 무례하게 보인다. 루터가 강조하는 것은 다시 한 번 말하지만 너무나 등한시된 교육, 너무나 방치된 말씀의 직부에 대해서다 양 떼들을 걱정하지도 않고 잠만 자고 있는 목자들의 나태함과 소홀함에 대해서다. 이전과 마찬가지로 그 시기에도 루터를 자극하고 열을 올리게 만든 일은 악습에 대한극도의 반감도 교회 를 회복시키려는 야심찬 욕망도 아니다. 개혁가라고? 그렇다. 내적 삶에 대한 개혁가다. 그런데 이것은 이미 보름스에서 세상 풍정에 대해 표명하게 될 다음의 대원칙을 선언하고 있다. “누구나 양심에 흔들림이 없어
야 한다"(Unus quisque robustus sit in conscientia sua).

  니체의 「아침놀」(Aurore)에는 흥미로운 부분이 하나 있다. 그것은 "최초의 그리스도인이라는 제목이 달려 있다. 니체는 “야심차며 성가신, 한 영혼 미신과 동시에 열의로 가득 찬" 한 정신인 사도 바울에 대한 이야기를 기술하고 있다.
  니체는 자신의 생각 속에서 한시도 떠나지 않으며 양심을 늘 괴롭히는 한 가지 고정관념으로 끙끙 앓고 있는 바울을 보여준다. 즉, 어떻게 율법을 이행할 것인가? 그래서 처음에 바울은 자신의 그 요구를 충족시키려 애쓴다. 그는 율법을 위반하거나 율법에 무심한 사람들로부터 율법을 맹렬히 수호한다. 광신적인 열의로 율법의 가르침을 이행한다. 수많은 경험 끝에 그는 다음 결론을 내린다. “성질이 격하고 감각적이며 우울하고 극도의 증오상을 가자는 자기 같은 인간은 율법을 이행할 수 없다. 그러면서도 그는 고집스럽게 행하고, 필사적으로 싸운다. 모든 것을 절제하고 억누르려는 맹렬한 자신의 요구를 충족시키기 위해 무척이나 애를 쓴다. 그렇지만 그 모든 노력은 결국 다음의 절망적인 결론밖에 얻지 못한다. "이행할 수 없는 율법의 고문을 이겨내기란 불가능하다......"
 
  그러면서도 또다시 불안과 고통 속에서 극심한 고뇌에 시달리고 필사격으로 추구하기를 거듭한다. "율법은 바울 자신이 못 박혀 있다고 느끼는 십자가가 된다. 그는 율법을 얼마나 혐오하는가! 얼마나 윈망하는가! 그것을 무효화시킬 수단을 찾기 위해 얼마나 백방으로 찾아다니는가!" 별안간 하나의 환상, 한 줄기의 빛, 그를 구원하는 생각이 돌연떠오른다. 아무도 보이지 않는 길 위에서 얼굴에 신의 광채를 띤 그리스도가 나타난다. 그리고 바울은 이런 말을 듣는다. "왜 너는 나를 핍박하느냐?" 번뇌하는 그 자존심 강한 환자는 갑자기 기력을 회복한 느낌이 든다. 도덕 자체는 사라져 무효화되어 저 높은 십자가 위에서 실현되었기에 정신적 절망은 사라진다. 그리하여 바울은 세상 사람들 가운데 가장 행복한 사람이 된다. "유대인들의 운명이, 아니 인류 전체의 운명이 그에게 느닷없는 이 두 번째 계시와 연관되어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는 사상 중의 사상 열쇠 중의 열쇠, 빛 중의 빛을 얻는다. 이후의 역사는 그의 주위를 돈다." 그리하여 율법의 옹호자는 율법 파괴의 사도요 선전자가 된다. 그는 말한다. "나는 율법 밖에 있다. 만일 지금 내가 율법을 다시 받아들이고 따르려 한다면, 나는 그리스도를 죄의 공모자로 만들 것이다." 왜냐하면 율법은·썩은 피가 병을 일으키는 것처럼, 계속해서 죄를 낳을 뿐이기 때문이다.
  그 후로 우리의 죄는 사해졌을 뿐만 아니라 죄 자체가 없어져버렸다. 이제 율법은 죽었다. 율법이 깃들어 있는 육신의 영은 죽었거나, 아니면 죽어가며 부패하고 있다. 얼마 동안 그 부패 속에서 사는 것! 그것이 그리스도인이 그리스도와 하나가 되고 함께 부활하며, 신의 은총을 함께 나누고 그리스도처럼 신의 아들이 되기 전의 운명이다. 최초의 그리스도인 그리스도교의 발명자는 그와 같았다!"
  이렇게 긴 구문을 거의 그대로 옮겨 적은 것을 용서해주기 바란다. 그런데 이런 말을 할 필요가 있을까? 있다. 한두 번 느끼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 구문을 읽을 때면, "바울의 이야기라고 생각한 부분에서 저절로、루터라는 이름을 말해야 하다니 항상 놀랍다는 말을. 그런데 전문가의 주장들처럼 니체가 옮겨 적은 바울의 사상이 세부적으로 정확하든 그렇지 않든 상관없다. 니체가 바울에게서 응용한 몇몇 표현이, 있는 그대로 수정없이 우리가 아는 습작 시기 루터의 사상과 일치하든 그렇지 않든 상관없다. 우리는 박식한 신학자들이 몰두했던 루터의 바울 신학 연구를 철학자에게까지 요구하지 않는다. 그러나 니체는 훌륭하게 변화의 한 도식을, 다시 말해 그 두 사람(사도 바울과 이단자 루터는 단지 교리적 차원만이 아니라 도덕적이고 심리 적인 차원에서도 한눈에 보이는 유대로 결속되어 있다)의 사상과 믿음의 변화를 동시에 나타내주는 확고하고 유연한 궤적을 그려 보여주었다.

  그렇게 이 시기는 우리에게 이전의 시기들을 일목요연하게 정리해줄 뿐만 아니라, 나란히 늘어서 있는 두 심리상태부터의 프리즘으로 바라본 바울의 심리상태, 그리고 상당히 불확실한 바울의 마음을 다소 의식적으로 모방한 루터의 심리상태의 본질적인 구조를 단번에 보여준다. 오로지 자기 자신과 자신의 구원 및 내적인 평화에만 마음을 쓰는 고독한 신도인 루터 개인에게, 독일인들을 비롯해 그 시기 대다수의 사람들이 그의 사상과 말을 자기들의 바람과 의도대로 왜곡하여 사회적인 가치와 집단적 존엄성을 부여하는 것을 보게 될 때, 니체가 우리에게 이런 말을 환기시키는 것은 결코 무익하지 않으리라. 즉, 그리스도 교는 부침 (浮沈)의 역사로 이루어졌다는 사실 말이다. 그리하여 훗날 마침내 그리스도교의 입문의 대가라 할 수 있는 심리학이 인간의 마음을 서슴없이 읽어내게 되었을 때, 오직 자신의 노력으로 커다란 변혁을 이뤄낸 한 개인에게서 여러 세기를 가로지르는 동일하면서도 다양한 정신들의 한 집단 한 일파(一派)에 대한 확고하고 명백한 전형을, 훌륭한 표본을 발견 할 수 있을 것이다.

- 마르틴 루터 - 한 인간의 운명, 뤼시앵 페브르, 이른비, 2017 중에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