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61. 자치통감 1.전국(戰國),진(秦)시대, 사마광, 권중달 옮김, 도서출판 삼화, 2012.
지은이 사마광(司馬光 : 1019 ~1086)
북송시대의 정치가, 역사가. 산서성 출신으로 속수선생(涑水先生)이라고도 하며, 죽은 뒤 온국공(溫國公)에 봉해졌으며 사마온공(司馬溫公)이라고도 한다. 스무살에 진사가 된 뒤 출세가도를 달렸으나, 신종이 왕안석(1021~1086)을 발탁하여 신법을 단행하자, 이에 반대하여 추밀부사직을 사퇴하고 지방으로 나갔다.
당시 사마광은 편년체 역사책(자치통감 資治通鑑)을 쓰고 있었는데, 신종은 이 책의 완성을 위해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1084년 마침내 자치통감을 완성하고 신종에 이어 등극한 철종 때 중앙에 복귀한다. 재상으로 왕안석의 신법을 폐지하는 등 활발한 활동을 펼쳤으나 몇 달 안되어 죽었다.
저술 <자치통감>, <속수기문 涑水紀文>, <사마문정공집 司馬文正公集> 등이 있다.
옮긴이 : 권중달
경기 김포 출생, 중앙대 사학과 명예교수, 1997~2005까지 200자 원고지 8만매 분량인 <자치통감> 전 294권을 완역했다. 역서 <역사학 연구방법론>, <중국사의 새로운 이해>, <허드슨 강변에서 중국사를 이야기하다> 등
자치통감
서기 1067~1084(왕안석이 죽기 2년 전)까지 17년간, 324권(본문 294권, 목차 30권). 송나라 신종이 서문을 내렸고, '자치통감'이라 하였다. 처음에 사마광은 '통지(通志)'라고 하였으나.
자치통감을 올리는 표문
~엎드려 바라옵건대, 폐하께서 이 책이 망령되게 저작되어 주살될 죄를 지었다 하여도 너그러이 생각하여주시고, 그 충성을 다하려는 뜻이 배어 있음을 살펴주시며, 맑고 한가한 즐거운 시간에 때로 살펴주시어 앞 시대의 흥하고 망하고 번성하고 쇠하였던 것을 거울 삼아서, 오늘 날에 득이 될지 손해가 될지를 상고하시고, 훌륭한 것에는 상을 주시고, 사악한 것은 물리치시며, 옳은 것은 취하시고, 틀린것은 버리시어 옛 군왕이 이룩하신 왕성한 은덕을 좇으시어 전에 없는 지극한 치세(治世)로 매진하시어 사해(四海)의 뭇 백성들로 하여금 모두 그 복을 입게 하신다면, 신은 비록 뼈를 구천에 버린다 하더라도 뜻하고 원하는 것은 영원히 완성된 것입니다~ 1084년 11월 올림
이 책을 읽는 동안 무엇보다고 큰 느낌을 받았건 것은 역사에 등장했던 그 잘난 수 많은 인물들이 성공했건 실패했건 간에 시간과 함께 사라져 버렸다는 것이다. 이 너무나도 간단한 이치가 가슴 뭉클하게 여러번 다가왔었는데, 이러한 것을 諸行無常이라고 하였던가? 이러한 역사적 귀결은 어느 성직자의 설법보다 훨씬 힘이 있게 '모든 것은 변한다'는 사실을 전달하고 있었다(......) 10년을 준비해야 하는 교육은 퇴출위기에 몰렸다. 유망한 직종을 선택하는 욕구야 나무랄 것이 없다고 하여도, 현재에는 유망직족이라고 하여도 학생이 졸업하여 사회활동을 하게 되는 10년 후에는 그 직종이 어떻게 될 것인지 생각하지 않고 하루살이 같은 선택을 하고 있다.
자치통감 '제왕학의 교과서'
권1 戰國時代 개시
권2 中原을 둘러 싼 각국의 각축전
권3 秦의 세력확장
권4 난세의 영웅들
권5 강해지는 秦과 망해버린 周
권6 진秦 始皇의 등장
권7 진 始皇의 戰國統一
권8 진나라의 멸망
戰國時代 1.(기원전 403~369년)
무엇을 명칭이라 합니까? 公, 侯, 卿, 大夫가 바로 이것입니다.
위열왕 23년(기원전 403년)
위문후가 여러 신하에게 물었다. "나는 어떤 군주인가?" 모두 말하였다. "仁慈한 主君입니다."
임좌가 말하였다. "주군께서 중산을 얻자 주군의 동생을 책봉하지 않고 주군의 아들을 책봉하였으니, 어찌 어진 주군이라고 하겠습니까?"
위문후가 화를 내자, 임좌는 재빠르게 나가버렸다. 그 다음으로 적황에게 물었더니 대답하였다. "어진 주군입니다." 위문후가 말하였다. "어떻게 그것을 아시오?"
적황이 대답하였다. "신이 듣기로 주군이 어질면 신하는 곧다고 합니다. 좀전에 임좌가 직언하였으니, 신은 이것으로 압니다."
위문후가 전자방(田子方)과 술을 마시다가 위문후가 말하였다. "종(鐘,악기의 일종) 소리가 고르지가 않는가? 왼쪽이 높군."
전자방이 웃었다. 위문흐가 말하였다. "왜 웃소?
전자방이 말하였다. " 신이 듣기로는, 주군이란 악관(樂官,음악을 관장하는 관리)을 뽑는데는 밝고, 음악소리에는 밝지 않다고 하였습니다. 지금 주군께서 음을 살피시는 일을 하시니 신은 그것을 관장하는 관리를 뽑는 일에는 귀머거리가 될까 걱정입니다."
위문후가 오기(吳起)를 장수로 삼았다. 吳起는 위나라 사람인데 노나라에서 벼슬을 하였다. 제나라 사람들이 노나라를 치자 노나라 사람들이 장수로 삼고자 하였다. 오기는 제나라 출신 여자를 처로 삼고자 하였으나, 오기는 그의 처를 죽이고 장수가 되기를 요구하여 제나라 군사를 대파하였다. 어떤 사람이 노후(魯侯)에게 그를 참소하였다. 오기는 죄를 얻을까 두려워하고, 위문후가 현명하다는 말을 듣고 그에게 귀부하였다(......)
오기가 장수가 되어 사졸 가운데 가장 아랫사람과 같이 입고 먹으며 잠자면서 잠자리를 펴지 아니하고, 다닐 때도 말을 타지 않고 또 친히 양식도 싸가지고 다니면서 사졸과 노고를 같이 하였다. 졸병 가운데 종기가 난 사람이 있었는데, 오기가 그것을 빨았다. 졸병 어머니가 이를 듣고 통곡하였다. 다른 사람이 말하였다.
"아들이 졸병이지만 장군이 스스로 그의 종기를 빨아주었는데 어찌하여 곡을 하시오?" 어머니는 말하였다.
"그렇지 않소. 옛날에 오공(吳公)이 그의 아버지(자기의 남편임)의 종기를 빨았는데, 그의 아버지는 뒤돌아서지 않다가 마침내 적에게 죽었습니다. 오공의 그 아들의 종기를 빨아주어 첩(妾)은 그가 죽는 곳을 모르게 되었으니, 내가 이를 통곡하는 것이오."
吳起가 위의 재상 전문(田文)에게 공로를 논하고 싶어했다. 오기가 말했다.
"삼군을 거느리고 적국이 감히 모의하지 못하게 한 것이 그대와 나 오기 중에 누구일까요?" 전문이 말했다. "그대만 못하지요."
"백관(百官)을 잘 다스리고 만백성과 친하며 부고를 가득 채워놓은 점에서는 그대와 나 오기 가운데 누구요?" 전문이 말하였다. "그대만 못하지요."
" 서하(西河)를 지켜서 秦의 군사가 감히 동쪽으로 향해 오지 못하게 하고, 한과 조가 손님처럼 우리를 좆게 한 점에서 그대와 나 가운데 누구이겠소?" 전문이 말하였다. "그대만 못하오."
오기가 말하였다. "이 세 가지에서 그대는 모두 나의 아래인데, 지위는 나의 위에 있으니 왜 그렇소?" 전문이 말하였다.
"주군은 어리고, 나라에서는 의심하고 있으며, 높은 신하들은 아직도 귀부하지 않고, 백성들은 믿지 못하고 있는데, 바야흐로 이러한 때 그대는 그대에게 위촉하겠소? 나에게 위촉하겠소?" 오기가 잠자코 있다가 말했다. "그대에게 위촉하겠군요."
위(衛)의 공손앙(公孫鞅)의 중서자(中庶子)인 위앙(衛鞅, 후일 秦의 상앙)은 비록 어리지만 기이한 재주를 가졌으니 바라건데 주군께서는 온 나라 일을 들어서 그에게 들으십시오. 공손앙이 말하자, 왕(위 혜왕)은 잠자코 있었다. 공숙(공손앙)이 말하였다.
"주군께서 위앙을 채용하라는 것을 듣지 않으시려면 바로 그를 죽여서 경내를 나가지 못하게 하십시오." 왕이 허락하고 갔다.
공숙이 위앙(衛鞅)을 불러서 사과하며 말하였다. "나는 주군을 먼저 생각하고 신하를 뒤에 생각하니 그러므로 먼저 주군을 위하여 모의하고, 뒤에 그대에게 알린다. 그대는 반드시 속히 떠나라." 위앙이 말하였다. "주군이 그대의 말을 채용하여 신(臣)에게 맡길 수 없는데, 또한 어찌 그대의 말을 채택하여 나를 죽일 수 있겠습니까?"
기원전 359년, 秦 효공(孝公)은 위앙을 좌서장(10등급 중급관리)으로 삼았다. 위앙은 법령이 구체화 되었으나 공포하지 않았는데, 백성들이 믿지 않을까 걱정을 하게되어 마침내 세 길(丈)되는 나무를 국도(國都)에 있는 저자의 남문에 세워놓고, 북쪽에 있는 문으로 옮길 사람을 모집하여 10금(金)을 주겠다고 하였다. 백성들이 이를 이상하게 생각하고 감히 옮기는 사람이 없었다. 다시 말하였다. "옮길 수 있는 사람은 50금(金)을 준다."
어떤 사람이 이를 옮기니 갑자기 50금을 주었다. 마침내 명령을 내렸다.
법의 숭상자 상앙도 효공이 죽고 공자 영건의 무리들이 그를 잡고자 했다. 상군(상앙)은 도망하여 위(魏)로 갔으나 위인들이 받아들이지 않고 진에 보내자 잡혀서 거열형(車裂刑)을 당하였다.
오고대부(五羖大夫) 다섯 장의 양가죽과 바꿔온 진 목공 때 재상 백리해의 다른 이름.
현왕 48년(기원전 321년) 제왕이 전영을 설(薛,서주라고도 함) 땅에 봉하고 정곽군이라 불렀다. 그는 아들이 40명 있었고, 천첩의 아들 중 전문(田文)이 있었는데 그가 맹상군이다.
전단의 화우지진(火牛之陳) 기원전 279년
모수(평원군, 조나라 식객) 기원전 258년, 낭중지추, 초나라와 합종 성사시킨 인물.
후생가외(侯生可畏) 기원전 258년, 위(魏)나라 공자(公子, 제후의 아들) 위무기(신릉군). 수레의 왼쪽 자리를 비워놓고 侯生(후영)을 영접하였다. 옛날에는 수레를 탈 때 높은 사람이 왼쪽에 앉았는데, 왼쪽을 비워놓았다는 것은 후생을 높은 예로 대하였다는 것. 신릉군의 식객만 3천명.
법의 결판, 진시황 때 이사는 요참형, 진 효공 때 상앙은 거열형으로 죽음을 당했다.
2015.3.29. 일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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