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37. 세네카 삶의 지혜를 위한 편지, 세네카, 김천운 옮김, 동서문화사, 2016.
세네카(BC 4?~AD65) : 로마 제정 초기의 스토아 철학자.
네로 황제의 가정교사. 황제 취임 후 네로가 소 아그리피나(네로 어머니)를 암살하자 황제 암살 누명을 쓰고 자결 명령. 자결 명령을 받은 세네카는 친구들이 보는 앞에서 스스로 혈관을 끊고는 독을 마시고 마지막으로 뜨거운 욕조에 들어가 그 열기로 죽었다고 전한다.
* '윤리서간집'이라고도 명명한다. '루킬리우스'에게 보내는 편지 형식 글.
차례
1. 내일을 생각하며
2. 가난한 이와 부자
3. 찾아오는 죽음, 빼앗아 가는 죽음
4. 영혼 속에서 완성되는 이성
5. 마음을 북돋움에 대하여
6. 죽음을 맞을 준비
7. 인간의 최고 선이란
8. 운명과의 싸움
9. 은혜와 보답
10. 선한 사람
11.~13. 영혼의 위대함
14. 현자들의 발견
15. 탐욕과 삶과 질
16. 슬픔이나 쾌락이나
17.~18. 철학의 요구, 무익한 지식
19. 영혼을 갈고 닦는 예지
20. 부와 행복과 자연
사라졌던 22권
에피쿠로스(BC341~271), 사모스 출신의 철학자로 (정신적)쾌락주의자의 창시자.
"기쁨이 있는 가난은 훌륭한 것" - 에피쿠로스
실제로 기쁨이 있으면 그것은 가난이 아니네. 조금 밖에 가지지 않은 사람이 아니라 더 많은 것을 원하는 사람, 그것이 바로 가난한 사람이라네. 금고 속에는 재물이 가득하고, 곳간에는 곡식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으며, 아무리 가축을 많이 키우고 들어오는 돈이 많다한들, 그게 무슨 의미가 있겠나? 타인의 것에 손을 뻗으려하고, 이미 획득한 것이 아닌, 이제부터 획득하고 싶은 것만을 생각하고 있으니. 부의 한도는 어디까지냐고 묻는건가? 먼저 필요한 만큼 가지고, 다음은 충분한 만큼 가지는 것, 이정도가 아닐까?
나날이 마음의 준비를 하여 인생을 편안한 마음으로 마칠 수 있도록 하게. 많은 사람들이 인생에 꼭 매달려 떨어지지 않으려는 것이, 마치 탁류에 떠내려가는 사람이 가시돋힌 풀이나 뾰족한 바위를 붙잡는 것 같네. 대부분의 사람들은 죽음의 공포와 삶의 고통 사이에서 불행하게 떠돌며, 살고싶어 하지만 죽는 방법도 모른다네. 그러므로 자네가 기쁘게 살아가고 싶다면 삶의 불안을 모두 없애버려야 하네. 아무리 큰 행복도, 그것을 잃었을 때를 대비한 마음의 준비가 되어있지 않은 사람을 행복하게 해주지 않는다네. 잃어버려도 마음이 아주 가벼울 수 있다면, 잃어버린 것에 대해 안타깝다고 느껴지지 않는 법이네.
철학이 원하는 것은 검소한 생활이지 형벌이 아니다.
큰 인물이란 도자기라도 은그릇처럼 사용하고, 은그릇도 도자기인 것처럼 사용할 수 있는 인물로, 그 어느 면으로도 부족함이 없어야 함을 말하는 것이네. 부(富)를 다루지 못하는 것은 영혼이 취약하다는 증거이지.
자신의 장점을 내부로 향하게 하게.
철학자 아탈로스 "친구는, 만드는 일이 가지고 있는 것보다 즐겁다. 마치 예술가가 그림을 그리고 있을 때가 다 그리고 났을 때보다 즐거운 것처럼"
참된 것이라면 다 내것이다.
고문관리가 올리는 효과는 얼마나 많은 고문도구를 보여주느냐로 결정(실제로 그 때까지 참을성 있게 견뎌낸 사람도 눈앞에 보이는 고문도구에 질려서 무조건 굴복하는 일이 있다.)되는데 이렇듯 우리의 영혼을 굴복시키고 항복하게 만드는 것 가운데 가장 효과를 나타내는, 눈에 호소하는 것들이 있기 때문이네. 이에 못지않은 악역(惡役)또한 있다네. 즉, 굶주림이나 갈증, 내장의 궤양이나 몸 안의 것을 불태우는 열병 따위들이지. 그러나 이들은 잠복을 하고 있으면서, 위협을 하거나 미리 알리는 일이 한 번도 없는게 문제라네. 이처럼 저들은 큰 전쟁을 치를 준비를 마친 강대국처럼, 당당한 모습을 보이는 것만으로도 승리를 거두어왔네.
마음 보다도 계산으로 움직이는 사람쪽이 많다네. 헐벗은 사람은 약탈자를 만나도 겁먹지 않는다네. 갈길이 막힌 거리 위에서도 가난한 사람에게는 평화가 있다네. 예부터 가르침을 지켜서 피해야 할 세가지가 있다네. 증오, 질투, 멸시 그것은 지혜에 의해서만 제어될 거라네.
자네 앞을 가고 있는 사람들의 수에 눈을 돌린 다음, 뒤에 이어지는 사람들의 수를 생각하게. 신들에게, 자네의 삶을 통해 감사하는 마음을 바치고 싶다면, 자신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을 앞질러 왔는지 생각하게. 그런데 다른 사람들은 문제가 되지않네. 자네는 자네 자신을 앞질러 왔으니까. 종착점을 정하게. 아무리 원해도 그것을 넘기기 힘든 종착점 말이네.
우리 인간은 운명이 정해놓은 어쩔 수 없는 규정으로 묶여있으며, 신이 우주의 창조자로서 모든 것을 배려하고 있다고는 하지만, 우연성(偶然性)이 인간세계를 무질서하게 움직이게 하며, 인간을 농락하고 있다고는 하지만, 우리는 철학을 자기를 지켜주는 수호신으로 삼지않으면 안되네. 철학은 우리를 격려할 것이네. 신에게는 기꺼이, 운명에게는 초연하게 따르라고 말이야. 또한 철학은 자네에게 가르칠 거라네. 신에게는 복종하고, 우연에는 견디라고.
"자네가 자연을 따라 산다면 결코 가난해지는 일은 없다네. 생각에 따라 산다면 결코 부자가 될 수 없지."
자연의 욕망에는 그 한도가 있지만 잘못된 생각에서 생겨난 욕망에는 끝이 없다네. 잘못된 생각을 가로막는 경계선이 없기 때문이지. 길을 나아가는 사람에게는 어딘가 도착할 곳이 있지만 잘못된 길에는 그 끝이 없다네. 그러니 허망(虛妄)에서 되돌아 오시게.
철학을 고문으로 초빙하게. 철학은 자네에게 주판 앞에 앉지말것을 권고할테니까. 많은 사람에게 철학을 하는데 장애물이 된 것은 가난이 아니라 부(富)라네.
"많은 사람들에게 있어서 부를 쌓아도 불행은 끝나지 않고 바뀌었을 뿐이었다."(에피쿠로스). 이것은 신기한 일이 아니네. 사실, 상처는 사물이 아니라 마음 속에 있는 거라네. 가난이 우리의 짐이었듯이, 풍요 또한 짐이었을 뿐이네. 병자를 눕히는 침대는 나무로 만든 것이든 황금으로 만든 것이든 차이가 없네. 병자를 어디로 옮기든, 병과 함께 그곳으로 옮기는 것이라네. 이와 마찬가지로, 병든 영혼이 있는 곳은 부유함 속이든 가난 속이든 차이가 없네. 병고는 어디든 뒤따라 오니까.(2020.9.12.)
"가진 것이 없으면 이 많은 나의 가족들은 어떻게 됩니까?"
그들은 자네가 먹여살리지 못하면 스스로 먹게 될 것이네. 또는 자네 자신이 베푸는 은혜로는 알 수 없는 것을 가난 덕분에 알게 되겠지. 가난은 참된 벗, 확실한 벗 만을 남기고, 자네 자신이 아니라(자네가 가지고 있는) 다른 것을 따르던 자들은 모두 보내버릴테니까. 그 이유만으로도 가난을 사랑해야 하는게 아닐까?
빛나는 것과 빛에는 분명 차이가 있지. 빛은 확실한 그 자체의 근원을 가지지만, 빛나는 것은 다른 것으로부터 무언가를 빌리고 나서야 빛날 수 있다네. 이런 차이가 지금의 생활과 자유로와진 삶 사이에도 있지. 지금의 생활은 다른 곳으로부터 오는 빛을 받고 있기 때문에 누구든 이를 가로막는 자가 있으면 그늘로 숨어버리지만, 자유로워진 삶은 그 자체의 빛으로 이미 밝게 빛난다네. 자네의 학문은 남들이 자네를 알게하고, 널리 유명한 사람으로 만들어 줄 것이네.
"자네가 퓌토크레이스를 부자로 만들기를 원한다면, 재산을 늘려주는게 아니라 욕심을 줄여주어야 할 것이다."
'좋은 행동을 할 것', '열심히 살 것' (에피쿠로스)
무엇을 하든 좋은 기회를 얻으려면 그 자리에서 눈을 부릅뜨고 있을 필요가 있다네. 그 기회라는 것은 쏜살같이 지나가기 때문이라네. 그러니 주의해서 좋은 기회가 있는지 살펴보게나. 그래서 기회를 만나면 꼭 붙잡고 온 힘을 다해 자네가 빠져있는 늪으로부터 벗어나도록 하게나.
(자존심의 꽃이 떨어져야 인격이라는 열매가 맺는다. 열정(불꽃)->숯불, 권태->열정적으로 살았다는 것. 김창옥교수)
그는(카토) 그 최후의 밤에 플라톤의 책을 읽으면서 칼을 머리맡에 두고 있었음을. 두 가지를 그는 최후의 상황에 대비해 준비하고 있었네. 책은 죽음을 숙원(宿願)으로 이끌어가기 위해, 칼은 죽음을 가능하게 하기 위해서였네.
위대한 키잡이는 돛이 찢어져도 배를 조종하고, 밧줄이나 쇠사슬을 잃어도 남은 선체를 나아갈 방향으로 돌리네.
죽음을 두려워하는 사람도, 늙음을 두려워하는 사람도 모두 어리석다. 늙음이 젊음 뒤에 오는 것처럼 죽음은 늙음 뒤에 오는 것이기 때문이다. 죽음을 원하니 않는 사람은 살기를 원하지 않았던 사람이다. 실제로 삶은 죽음을 전제조건으로 받은 것이고, 그 종착지 또한 죽음이라네. 죽음을 두려워하는 것은 이치를 모르는 자가 하는 일이네. 누구나 같은 조건에 있고, 공정함의 근본은 공평함에 있는 것이니까.
우리가 두려워하는 것은 죽음이 아니라, 죽게 되리라는 생각이다.
위대한 정신은 모든 사람에게 열려있고, 그 점에서는 모두 우리가 고귀하다네. 철학은 누구도 거부하지 않고 선택도 하지 않네. 모든 사람들에게 빛을 비추는거지.
피타고라스 밑에서 배우려면, 먼저 얼굴과 체격으로 성격과 자질을 심사받고, 여기에 합격하면 일정기간 침묵하도록 요구받았다고 한다. 피타고라스에게 배우는 제자들은 5년 동안 침묵해야만 했다.
현자는 결코 쫒겨나지 않네. 왜냐하면 쫒아낸다는 건 물라기기를 바라지 않는 곳에서 몰아내는 것이기 때문이네. 현자는 자신이 원하지 않는 일은 아무것도 하지않고, 강제를 피하네. 왜냐하면 강제되기 전에 자신의 의지로 하기 때문이네.
우리가 충분히 살았는지 그 여부를 결정하는 것은 햇수와 날수가 아니라 우리의 영혼이라네.
모든 것을 가벼이 볼 수 있는 사람은 있지만, 모든 것을 소유할 수 있는 사람은 없네. 부에 이르는 가장 빠른 지름길은 부를 가벼이 보는 것이라네.
모든 사람은 죽게 마련이라는 것. 그리고 그 죽음에는 어떤 확실한 법칙이 없다는 것을. 언제든지 일어날 수 있는 일이라면 오늘이라도 곧바로 일어날 수 있네. 기억해두게.
누구든지 자기 육체의 단점은 잘 깨닫는 법이네. 그러니까 위가 안좋으면, 토해내어 위장을 가볍게 하는 사람, 식사횟수를 늘려서 위장을 튼튼하게 하는 사람, 이따금 절식하여 신체를 단련하고 깨끗이 정화하는 사람등이 있네. 다리에 자꾸만 통증이 오는 사람들은 술도 목욕도 멀리하네. 다른 일에는 무관심한 사람들도 거듭 자신의 몸을 공격해오는 것에는 정면으로 맞선다네.
자살할까? 죽음을 기다릴까?
""너는 무슨 좋은 일이라고 남이 한 일을 먼저 하려 드느냐?" - 그리스 보니아
2020.9.26.
'이 일을 끝내면 온 영혼을 쏟아봇자.' '이 귀찮은 일이 끝나면 배움에 온 힘을 기울이자.' 이렇게 말하지. 철학은 여유가 있을 때 하는 게 아니라네. 철학을 하기 위해 여유를 만들어야 하네. 다른 모든 일을 소홀히 하더라고 우리는 철학에 힘쓰세. 철학을 위해서는 아무리 시간이 있어도 부족하니까 말이야.
아탈로스는 자주 이런 비유를 자주 썼지. '자네는 개가 주인이 던진 빵이나 고기조각을 입을 벌리고 받아먹는 모습을 본 적이 있겠지. 받은 먹이는 바로 꿀꺽 삼키고 언제나 다음 먹이를 바라며 입을 열고 있지. 우리에게도 이와같은 일이 일어난다네. 우리는 자신이 기대하고 있는 곳에 운명이 준 것을 모두 즐기는 일없이 바로 삼켜버리고는 또 다른 것을 잽싸게 낚아채려는 생각에 정신이 없으니까 말이네.'
현자에게는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네. 모든 것이 충족되어 있기 때문이라네. 행운이 굴러들어와도 침착하게 받아들이며 간직하지. 현자는 기쁨을 최대한 즐긴다네. 이는 지속적이며 자신이 본디부터 가진 기쁨이라네.
그리고 제3의 사람들이 있다네. 이 사람들은 지혜 주변에 머물지만 지혜와 접촉한 적이 없지. 그러나 지혜가 거기 있다는 사실은 알고 있기에 말하자면 사정거리 않에 있는 거라네. 그들은 농락당하지도 않고 흘러가지도 않아. 아직 육지에 올라가지는 않았지만 이미 항구에 들어섰다네. 그래서 정상에 있는 사람들과 바닥에 있는 사람들 사이의 벽은 그만큼 크고, 중간쯤에 있는 사람들에게도 그에 상응하는 거센 파도, 즉 나쁜 쪽으로 되돌아갈지도 모를 큰 위험이 덮치지만 우리의 일이 너무 바빠 신경을 쓸 이유가 없지.
훌륭한 두 인물을 비교할 때 좀 더 인기있는 사람이 더 훌륭하다고는 말할 수 없네. 이는 동등한 지식을 가진 두 조타수를 비교할 때 좀 더 크고 훌륭한 배를 조정하는 사람이 뛰어나다고 말하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라네.
인간의 몸속에는 신적인 씨앗이 뿌려져 있다네. 그 씨앗을 제대로 돌볼 줄 아는 사람이 받아들인다면 그 기원과 비슷한 모습으로 싹이 터서 드러난 원천과 동등하게 성장하지. 그렇지만 제대로 돌보지 못하는 사람은 풀 한포기 조차 자라지 않는 축축한 늪지대처럼 씨앗을 죽이고 만다네. 거기서 자라는 풀은 곡식이 아니라 독초이기 때문이지.
불행은 떨쳐버릴 수 없다면 미루는게 최선이네. 자네가 알았으면 하는 사실은, 누구도 미래의 일로 괴로워해서는 안된다는 점이네. 누구든 50년 뒤에 자신이 처형을 받게 될 운명이라는 말을 들었을 때, 마음이 어지러워지는 것은 오직, 그 때까지의 세월을 뛰어넘어 한 시대 뒤에 찾아올 불안 속에 자신을 내던진 경우 뿐인것이네. 마찬가지로 영혼도 스스로 병든 것을 기뻐하며 고통의 원인을 추구할 때, 지난 날의 잊혀진 일로 슬픔에 잠길 때가 있네. 지나간 일도, 앞으로 일어날 일도, 지금은 존재하지 않는다네. 따라서 그 어느쪽도 지금 우리가 그것을 느낄 필요는 없네. 그런데 괴로움은 느낄 수 있는 것에서가 아니면 생기지 않는다네.
자네는 언제 그 많은 공부를 끝낼 셈인가? 자넥 배운 것들을 언제 마음 속에 꾹 눌러담아 쏟아지지 않도록 할 것인가? 언제 그것들을 시험해 볼 참인가? 다른 때 처럼 외워두기만 하는 걸로는 부족하네. 행동으로 실천하여 시험해보지 않으면 안된다는 말이네. 행복이란, 그저 알고만 있는 사람이 아니라 행동하는 사람에게 주어니는 것이니까.
감정이란 타당성을 뺀 마음의 움직임으로, 돌연 부추김을 받는 것이라네. 이 현상이 몇번이고 일어나는 것을 그대로 방치한 결과가 마음의 병이라 할 수 있지.
삶이란 죽음을 맞을 용기가 없다면 노예처럼 복종하게 될 뿐이다.
삶 또한 연극처럼 얼마나 긴가가 아니라 어느만큼 훌륭하게 연기했는가가 중요하다네. 어디쯤에서 끝내야 하는가는 중요하지 않다네. 자네가 끝내고 싶은 즈음에서 끝을 내시게. 다만, 훌륭한 결말을 지어야만 하네.
질병에도 중요한 것이 세 가지가 있네. 죽음의 두려움, 몸의 고통, 즐거움의 단절. 죽음이 찾아오는 것은, 오늘 자네가 병에 걸렸기 때문이 아니라 지금 자네가 살아있기 때문이네. 그러한 운명은 질병에서 회복된 뒤에도 기다리고 있네. 완쾌되었을 때, 자네는 죽음이 아니라 고르지 못한 건강상태를 벗어난 것이네.
음주는 모든 악덕을 부추기고 드러낸다.
용기 있는 사람은 두려움이 없다. 두려움이 없는 사람은 걱정거리가 없다. 걱정거리가 없는 사람은 행복하다.
금고는 그 내용물의 부속품이다. 거액의 자산을 가진 사람들도 마찬가지다. 그들은 자산에 덧붙여진 부속물에 지나지 않는다. 현자가 위대한 까닭은 위대한 영혼을 지녔기 때문이다.
"불행한 자들이여, 도대체 당신들은 자신의 식욕이 배보다 더 크다는 것을 알고나 있는가"
옷을 담는 상자를 보고서 옷을 평가하는 사람이 있을까. 칼집이 칼의 좋고 나쁨을 결정하지는 않네. 그러니 육체에 있어서도 마찬가지네. 만일 선택하는 일이 허락된다면, 나는 건강과 활력을 얻으려 하겠지만 그 때의 선(善)은 그것들에 대한 나의 판단이지 그것 자체는 아니라네.
"아무개는 80년을 살았다"
아니네. 80년 동안 이 세상에 있었을 뿐이라네. 하기는 자네가 그 사람이 '살았다'고 한 말이 나무가 '살아있다'고 하는 것과 같은 뜻이라면 모르지만. 귀중한 물건과 마찬가지로 우리의 삶도 그 분량이 아니라 무게가 나가도록 하는데 유의하게나. 삶을 시간이 아니라 이루어낸 일의 크기에 따라 계산하게. 활발하게 운명을 경멸하며, 인생의 종군기간을 모두 마치고 가장 높은 선에 올라간 사람과 그저 많은 세월을 지나갔을 뿐인 사람의 차이를 알겠는가.
"화합에 의해 작은 것도 크게 자라지만, 불화에 의해 지극히 큰 것도 무너진다." - 마르쿠스 아그리파 -
우리는 함께 살아가는 존재들이라네. '함께 살아가기 위해' 태어났으니까. 우리의 공동 사회는 돌을 쌓아올려 만든 아치와 꼭 닮았다네. 아치는 돌끼리 서로 지탱하지 않으면 무너져 버리지. 바로 그것 때문에 유지되고 있는 거라네.
자유를 위해 절대 타협하지 말라.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시도하라. 예속당하는 편이 스스로 굴복하여 다가가는 것 보다 명예로운 일이다.
외부에서 온 것으로부터 기쁨을 발견하는 사람이 서 있는 기반은 쉽게 무너지거든. 외부에서 들어온 기쁨은 외부로 다시 나가 버린다네. 그러나 자기 자신 안에서 일어나는 기쁨은 확고하고 흔들림이 없으며, 더욱 커져서, 마지막까지 우리를 따라 다닌다네.
가진 것은 빼앗아 갈 수 있어도 가졌다는 (과거의 ) 사실은 빼앗아 갈 수 없다. 우연이 우리에게서 물건을 빼앗아 가지만, 그것을 사용하고 누렸던 기쁨은 우리에게 남아있다. 그러나 상실을 부당하게 탄식함으로써 우리는 그 기쁨을 잃어버린다. 그러니 자신에게 이렇게 말하라.
"소름끼칠 만큼 무서운 것이라도 극복할 수 없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자네도 같은 길은 가지 않으면 안된다면, 먼저 간 사람을 탄식하고 슬퍼하는 것만큼 어리석은 일이 또 있을까? 언젠가는 일어나게 될것을 뻔히 알면서도 그 일을 탄식해야 할까? 인간이 죽는 준재라는 사실을 생각하지 않는다면, 이는 자신을 속이는 것이네. 반드시 일어날 거라고 늘 말하던 일을 탄식한단 말인가? 누군가가 죽은 것을 탄식하는 사람은 모두 그 사람이 인간이었던 사실을 탄식하고 있는 것이네. 모든 사람은 같은 조건에 묶여있네. 즉 태어난 사람에게는 죽음이 기다린다는 것이네. 우리들 사이에 시간의 간격은 서로 다르지만, 죽음이라는 결말은 평등하네. 최초의 날과 최후의 날 사이에 뻗어있는 이(삶이라는) 기간은 다양하게 변화하는 불확실한 것이네. 만일 그 기간을 고통스럽게 생각한다면 그것은 어린 아이에게도 길고, 세월을 화살같다고 본다면 노인에게도 짧은 것이라네. 모든 것이 미끄러지지 쉽고 믿을 수 없으며, 어떤 날씨보다 변하기 쉽네. 운명의 명령에 따라서 모든 것은 동요하며 완전히 반대방향으로 뒤바뀌기도 한다네. 인간세계의 이러한 혼란 속에서는 누구에게나 확실한 것은 아무것도 없네. 단 한가지, 죽음만은 예외이네. 그런데 인간은 아무도 속는 일이 없는 이 유일한 것에 탄식한다네.
내일이라는 날의 소유자도 아닌 인간이 일생의 계획을 잘 나눈다는 것은 얼마나 어리석은 일인가. 먼 앞날까지 희망을 품는다는 것은 얼마나 광기어린 짓인가. 나는 (원하는 것을) '사리라, 지으리라, 빌려주리라, 거두리라, 명예로운 자리에 오르리라. 그리고 늙어서 쇠약해지면 여생을 느긋하고 한가하게 보내리라.'하고
믿어주게. 운이 좋은 사람에게 조차 모든 것은 불확실하다네. 미래에 대해서는 어느 누구고, 무엇 하나도 스스로에게 약속해서는 안되네. 나에게 불확실한 일이라면 그것이 자연의 질서로서 확실한지 어떤지가 나와 무슨 관계가 있단 말인가?
어디까지 여행하든, 자네는 욕망과 분노를 초월한 장소에 도달할 수는 없다네. 만일 그러한 장소가 있다면 인류는 벌떼같이 그곳으로 달려갈 걸.
즐거운 여행을 하고 싶으면 자네의 여행동무(영혼)을 건전하게 유지해야 하네.
철학의 힘은 열심히 공부하는 사람뿐만 아니라, 그저 교류만 하고 있을 뿐인 사람도 이롭게 하는 점에 있다네. 햇빛 속으로 나가는 사람은 그것 때문에 나간것이 아니라도 햇빛에 그을리게 된다네. 향유가게에 앉아 잠시 시간을 보낸 사람은 그곳의 향기가 몸에 밴 채 돌아간다네. 그와같이 철학자 옆에 있었던 사람도 유익한 것을 반드시 뭔가 이끌어내는 법이지.
알렉산드로스 대황은 분명 페르시아나 히르카니아, 인도, 오케아노스에 이르는 영역에 펼쳐진 동방의 여러 민족들을 공격해 승리를 거두었으나, 그 자신은 친구를 죽이거나 잃고 비탄의 어둠속에 누워 때로는 자신의 죄를, 때로는 상실을 한탄했지. 그렇게나 많은 왕과 여러 민족들을 정복한 사람이 분노와 비탄에는 복종했던 것이네. 이는 그가 목표로 한 일이 온 세상을 지배하는 일이지. 자신의 감정을 지배하는 일은 아니었네.
아아! 이 얼마나 큰 잘못에 인간은 사로잡혀 있는가. 바다 저편까지 지배하기를 바라며, 자신의 가장 큰 행복은 수 많은 속주들을 무력으로 점령해 새로운 속주를 낡은 속주들에 더하는 일이라고 생각하고 있으니 말이네 그들은 신들의 권력에도 필적하는 위대한 왕권이 무엇인지를 모르는 거라네. 자신을 지배하는 일이야말로 가장 큰 지배라는 것을.
왕이 무사하다면 모두가 마음을 하나로 합치지만, 왕(영혼)을 잃으면 모두가 신의를 깨어버린다.
지혜는 소유물이고 지혜가 있는 사람은 소유주이네. 지혜란 최고이자 최선의 상태에 이른 완전한 정신을 말하네. 바로 삶의 기술이라네.
선(善)이란 무엇인가? 말할 것도 없이 더러움 없이 순수한 영혼이네. 신과 경쟁하며 인간 한계를 넘어서 자신을 높이고, 자기 밖의 어떠한 것도 자기의 것으로 생각하지 않는 영혼이라네. 자네는 이성적 동물이네. 그렇다면 자네 안의 선은 어떤 것일까? 완전한 이성이네. 이것을 자네는 오늘 여기서 그 자신의 궁극을 향해 일깨우게. 그리고 가능한 크게 자라도록 내버려두게. 자네 자신 안에서 자네의 모든 기쁨이 태어날 때, 바로 그 때 자네 자신은 행복하다고 판단하게. 이는 사람들이, 빼앗고, 원하고, 매우 소중히 하는 것들을 본 뒤에도, 자네가 다른 것보다 더 갖고 싶은게 아니라, 단순히 갖고 싶은 것을 아무것도 발견할 수 없는 바로 그 때라네. 자네게게 쉬운 공식을 알려 주겠네. 그것에 비추어 자네 자신을 헤아려. 이제 자신이 완전하다고 생각할 수 있는 기준이 되는 공식이라네. 자네가 자네 자신의 모든 것을 얻는 것은, 이 사실을 이해했을 때이네. 행운을 전혀 얻지 못한 사람이나 얻은 사람이나 차이는 없다는 것을.
'바람같은 권력'
해설
서기 62년, 세네카는 네로 황제에게 자신이 은둔생활을 하도록 허락해달라고 청했다. 어린 네로의 교육을 맡은 지 13년, 네로가 54년에 크라우디우스 황제 뒤를 이은 뒤에도 친위대장 부루스와 함께 8년 동안 황제의 감찰관으로 지낸 뒤였다. 결별의 직접적인 계기는 네로의 사주에 따른 부루스의 독살설이 컷다. 아마도 세네카에게는 그 과정이 59년 네로 황제가 친어머니 아그리피나를 암살했을 때부터 보였으리라. '폭군'의 욕망이 바른 길을 벗어났기 때문이다. 세네카는 정적의 반감을 피하기 위해서 네로에게서 받은 재산을 반환하겠다고 청했는데, 타키투스 <연대기>에 따르면 "그 때가지 권세에 의지했던 생활로부터 완전히 벗어나, 인사하러 오는 사람들을 집안에 들이지 않고 따르는 사람들도 피했다. 로마에 나타나는 일도 드물었고, 건강이 나빠졌거나 철학연구를 위해 두문불출하는 듯 했다. " 그로부터 3년 뒤인 65년, 세네카는 네로의 명령으로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마침 아내 파울리나도 함께 저승길을 가려고 했지만 실패했다.
이 <윤리서간집>은 친구 루킬리우스에게 앞으로 잘 살기 위해서는 철학에 전념하라고 권하며, 그와 함께 수양이 의미를 생각하면서 실천으로 열매맺고자 하는 세네카의 뜻이 바탕을 이루고 있다.
죽음이 다가온 것을 몸소 느끼는 지금 '하루는 어느 하루와도 같다'. 즉 '아무리 긴 시간이 펼쳐진다 해도 하루 속에서 찾아낼 수 없는 것은 없다.' 따라서, '하루는 마치 대열을 짜듯이, 그리고 삶이 끝나기 전까지 완수해야 한다.' 누구든 '나의 일생은 이미 충분하다.'고 말하며, "강제되어 살아가는 것은 고통이지만, 강제로 삶을 강요하는 것은 없다." 마땅히 없는게 옳다. 자유에 이르는 길은 여기저기로 열려있고, 방법도 많으며, 짧고 쉬우니까. 영혼의 문제가 근본문제다.
2020.10.18. 일요일 아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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