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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46. 철학의 위안, 알랭드 보통,청미래, 2012.

햇살처럼-이명우 2022. 1. 21. 09:11

646. 철학의 위안, 알랭드 보통,청미래, 2012.

(불안한 존재들을 위하여)

 

차례

1. 인기없는 존재들을 위하여

2. 가난한 존재들을 위하여

3. 좌절한 존재들을 위하여

4. 부적절한 존재들을 위하여

5. 상심한 존재들을 위하여

6. 어려움에 처한 존재들을 위하여

 

  우리가 지금 눈앞에서 벌어지는 현상에 대해서 의문을 품지 않는 것은 다른 사람의 적의(敵意)를 두려워해서만은 아니다. 그것에 못지않게, 사회적 관습이라는 것은 당연히 그만한 근거를 가지고 있음에 틀림없다고 치부해버리는 각자의 내적 인식에 대해서도 의문을 품으려는 의지는 곧잘 꺾여버린다. 심지어 그 근거라는 것이 무엇인지 확실히 알지도 못하면서 그런 관습들이 오랫동안 많은 사람들에 의해서 지켜져 내려왔다는 이유만으로도 우리는 좀처럼 의문을 품지않는다. 우리는 사회가 어떤 신념을 정착시키는 과정에 중대한 실수를 저질렀을 수도 있고, 또 그런 사실을 깨당는 사람이 나 혼자일 수도 있다는 점을 우리는 인정하지 못하는 것 같다. 우리는 스스로를 지금가지 전혀 알려지지않은, 따라서 접근하기 어려운 진실을 추구하는 선구자로 인식하지 못하기 때문에 의문이 생기더라도 쉽게 무시해버리고 그저 다수를 따른다. 

 

  부유한 사람은 존경을 받을 수는 있지만, 그 존경은 어디까지나 부를 축적한 방식에 달려있다. 빈곤이 그 자체로 한 개인의 도덕적 가치의 한 자락을 들추는 것이 아닌 것처럼 말이다. 부유한 사람이 자신의 재산을 보면서 자신의 미덕을 증명해 줄 것이라고는 아무런 이유가 없듯이, 가난한 사람도 자신의 궁핍을 악행의 신호로 생각할 이유가 전혀 없는 것이다. 

 

  모두가 더불어 사는 과정에서 어려움을 겪는 까닭은 다른 사람의 평가와 자신의 실제 사이의 간극 때문이다. 이를테면 신중하게 처신하다가 우유뷰단하다는 비난을 받기도 한다. 수줍음은 간혹 교만으로, 남의 마음에 들러는 욕망은 아첨으로 오해받는다. 누구나 그런 오해를 지우려고 노력하지만, 그 때마다, 목구멍은 바짝 타들어가고 머리속에 떠오르는 단어들은 의도했던 것들이 아니기가 십상이다. 

 

  나는 어떤 일로도, 심지어 그렇게나 소중하다는 학문을 얻는 일로도 머리를 싸맬 생각은 없다. 책을 통해서 내가 추구하는 모든 것은 시간을 올바르게 활용하여 나 자신에게 즐거움을 안겨주는 것이다. ..... 만약 책을 읽다가 어려운 문장을 만나기라도 하면 그 부분을 곰곰히 생각하느라 손톱을 물어뜯는 일은 결코 없다. 한두번 이해해 보려고 노력하다가 안되면 그것으로 그만이다...... 어떤 책이 나를 피곤하게 만들면, 나는 다른 책을 집어든다.  「수상록 」  

 

  상심한 존재들을 위하여

*아르투르 쇼펜하우어(1788-1860),

사랑으로 인한 슬픔의 치유에는 , 그가 아마 철학자들 중에서 최고일 것이다.

 

  1819년 「의지와 표상으로의 세계 」가 출간된다. 이 책은 230부가 팔린다. "모든 인생사는 고통의 역사이다. " "살모사와 두꺼비까지 나와 대등하다는 환상만을 제거할 수 있더라도, 나에게 큰 도움이 될 것이다"

  1820년 쇼펜하우어는 베를린 대학교에서 철학교수 자리를 얻으려고 시도한다. 그는 "철학개론", 즉 "이 세상과 인간정신의 정수에 관한 이론"이라는 강의를 맡는다. 학생은 5명이 수업을 듣는다. 가까운 건물에서는 그의 라이벌인 헤겔이 300명의 청중에게 강의하는 소리가 들린다.  

 

  "결혼한다는 것은 서로에게 혐오스러운 존재가 되기 위해서 가능한 한 모든 노력을 다하는 것을 의미한다."

 

  1840년 그는 대체로 동양종교에, 그 중에서도 특히 브라만교(그는 매일 밤 「우파니샤드 」 몇 쪽을 읽는다)에 끌린다.

  1850년 "부츠"라는 갈색 푸들 구입, 훗날 가장 친하게 아낀다.

  1851년 그는 에세이와 금언을 골라 엮은 「소논문과 보충논문 」(국내에서는 「쇼펜하우어의 인생론 」이라는 제목으로 번역 출간) 출간한다. 저자 자신도 깜짝 놀랄 정도로 이 책은 뜻밖에 베스트셀러가 된다.  

 

  니체의 설명에 따르면, 기독교는 로마제국의 어리석은 노예들의 정신에서 비롯되었는데, 산의 정상에 오를 베짱이 부족했던 그들은 산기슭에 머물러 있어도 기쁘기만 한 철학을 스스로 만들어냈다. 기독교인들은 성취감을 실제로 불러 일으키는 요소들(세상의 지위, 섹스, 지적정복, 창의성)을 즐기기를 원했지만, 그런 아름다운 것들이 요구하는 어려움을 극복할 용기가 없었다. 그래서 그들은 위선적인 믿음을 짜내기에 이르렀다. 말하자면 자신들이 원하기는 하지만 싸움을 벌여가며 얻기에는 역부족인 대상들을 거부하는 한편, 그들이 굳이 원하지는 않았는데도 어쩌다 손에 넣게 된 것들을 찬양한다는 식이었다. 무력함은 "선함"이 되었고, 천박함은 "겸양"이 되었다. 자신이 혐오하는 사람에 대한 종속은 "순종"이 되었고, 니체의 표현을 빌리면 "복수할 수 없는 것"은 "용서"로 둔갑했다. 허약함을 나타내는 모든 감정은 신성한 이름으로 덧씌워져 "자발적인 성취, 무엇인가를 갈망함으로써 선택된 것, 하나의 행위, 하나의 성취"처럼 보이도록 만들었다. "위안의 종교"에 빠진 기독교인들은 그들의 가치체계에서 바람직한 것보다는 쉬운 것에 우선권을 둠으로써 그들의 삶의 잠재력을 모두 낭비해 버렸다. 

 

  인간의 병 중에서 가장 나쁜 병은 사람들이 자신의 병을 다스리는 방식에서 비롯되었다. 치유로 보이는 것이 결국에는 그 치유의 대상이 되었던 병보다 더 독한 무언가를 낳았다. 즉각적으로 효과를 나타내는 수단들, 마취와 도취, 이른바 위안들이 어리석게도 실질적인 치유책으로 생각되었다. 알려지지 않은 사실은..... 고통을 곧장 진정시키는 방법들은 그 고통을 낳은 불만을 일반적으로 더욱 깊이 악화시키는 대가를 치른다는 것이다. -「서광 」

 

  모든   괴로운 상태를 제거해야 하는 것으로, 불만스러운 것으로 간주하는 것은 (극히 어리석은) 짓이다. 그 결과로 나타나는 것은 일반적인 의미에서 진정한 재앙이다....... 나쁜 기후를 제거하겠다는 의지만큼이나 비슷하에 우둔한 짓이다.

 

  우리를 행복하게 하는 것들이라고 해서 다 좋은 것은 아니다. 우리를 아프게 하는 것들이라고 해서 다 나쁜 것은 아니다. 

 

2021.1.31. 일요일 저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