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티아고 대성당의 '영광의 문' 조각상
추석 다음 날이다. 소대장 때 선임하사님께 카톡 메시지가 왔다. 오늘도 화이팅하라는 응원의 메세지다. 선임 하사님은 현재 여산에 있는 부사관 학교에서 목회자로 활동하고 계신다. 새벽 산책을 다녀왔다면서 오늘도 멋진 날이 되라고 나를 응원하는 메시지다.
선임하사님이 목회자로 계신다는 이야기를 듣고, 얼마 전에 읽었던 양정무 교수님의 「미술이야기」에 나오는 스페인의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 성당이 생각났다. 예수와 4대성인의 조각이 있는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 성당은 순례자들을 위해 만들어진 성당이라는 것과 예수의 제자 중 한 사람인 야고보의 유해가 안치되어 있다는 사실, 중세인들은 왜 그렇게 목숨을 건 순례를 떠났는지를 알기 쉽게 설명해 놓은 책이다.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의 산티아고는 야고보 성인이라는 뜻이다. 성인을 뜻하는 '세인트Saint'와 예수의 열두 제자 중 한 사람인 야고보의 스페인식 표현 ‘야고Yago'가 합쳐진 말이다. 콤포스텔라는'별의 들판'이라는 뜻이니, 합치면 '야고보 성인의 별이 빛나는 들판'이라는 의미가 된다.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가 성지로 부상한 것은 서기 800년 경에 이곳에서 야고보 성인의 유해가 발견되었기 때문이다
유럽 사회는 서기 1000년을 앞두고 서서히 공포에 빠진다. 서기 1000년에 세상이 멸망한다는 이야기 때문이었다. 오늘날에도 2000년 뉴 밀레니엄을 맞이할 때 사회가 큰 혼란에 휩싸일 거라는 공포 분위기가 조성되었지만, 중세 기독교인의 공포는 그보다 훨씬 컸다고 한다. 많은 중세인들은 1000년에 세상의 종말이 온다고 믿었고, 성경에 나오는'최후의 심판'이 서기 1000년에 일어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걱정과 달리 1000년으로 넘어간 그날에도 세계는 멀쩡했다. 사람들은 허탈해 하면서도 안도했다.
많은 중세인은 '이제 한동안은 별일이 없겠구나.' 하고 생각하게 되었고, 동시에 움츠러들었던 중세 사회가 조금씩 기지개를 켜기 시작했다. 이렇게 사회가 안정되는 기미를 보이자 중세 사람들은 당장의 내일이 아니라 앞으로 다가올 천 년을 생각하기 시작한다. 사회가 안정되면서 건설 붐이 일어났다. 이 현상을 매우 잘 보여주는 글이 있다.
"기독교 공동체들은 치열한 경쟁심 때문에 인근 교회보다 더 호화로운 교회를 갖고 싶어 했다. 지상 세계가 오래된 옷을 벗어버리고 교회의 흰옷으로 갈아입는 듯하다. 그리하여 거의 모든 교회들, 그러니까 수도원부터 마을의 조그만 예배당까지 신자들에 의해서 전보다 더 보기 좋게 지어지고 있다." 프랑스 부르고뉴에서 활동했던 수도사 라울 글라베르의 글이다. 그런데 이때 또 다른 유행이 생겨난다. 다소 엉뚱하게 느껴질 수도 있겠지만 그 현상은 여행 붐이었다. 물론 요즘 사람들이 떠올리는 여행은 아니고, 성지 순례의 형태로 나타났다.
"기독교 공동체들은 치열한 경쟁심 때문에 인근 교회보다 더 호화로운 교회를 갖고 싶어 했다. 지상 세계가 오래된 옷을 벗어버리고 교회의 흰옷으로 갈아입는 듯하다. 그리하여 거의 모든 교회들, 그러니까 수도원부터 마을의 조그만 예배당까지 신자들에 의해서 전보다 더 보기 좋게 지어지고 있다." 프랑스 부르고뉴에서 활동했던 수도사 라울 글라베르의 글이다. 그런데 이때 또 다른 유행이 생겨난다. 다소 엉뚱하게 느껴질 수도 있겠지만 그 현상은 여행 붐이었다. 물론 요즘 사람들이 떠올리는 여행은 아니고, 성지 순례의 형태로 나타났다.
중세 기독교인들은 천국에 가려면 죽기 전에 일생 동안 저지른 죄를 용서받아야 한다고 믿었다. 성지 순례는 확실한 참회 방법 중 하나였다. 그래서 죽기 전에 꼭 한번 성지에 다녀와야 편안하게 눈을 감을 수 있었다. 그들은 최후의 심판이 일어나지 않았다는 사실이 신이 인간에게 한번 더 참회 할 기회를 주었다는 증거라고 믿었다. 신이 준 새로운 기회에 감사하면서 새 천년의 시작과 함께 성지 순례를 떠나는 사람이 폭발적으로 증가했다. 길고 긴 순례길은 목숨을 걸어야 할 만큼 고난하고 힘든 여정이었고, 그래서 그 자체로 고행과 속죄의 과정이었다. 또 순례 과정 자체도 중요했다. 길 위에서 만나는 사람들, 마주치는 풍경, 순례길 곳곳에서 순례자를 맞이하는 교회 등이 모두 신에게 한 발 한 발 다가가는 과정이었다.
당시 많은 지역이 순례의 목적지가 되었지만, 사람들은 이왕이면 가능한 한 최고의 성지에 가고 싶어 했다. 최고의 성지라면 예나 지금이나 기독교 최고의 성지는 예루살렘이다. 예루살렘은 기독교인이라면 누구나 선망하는 성지다. 예수가 죽고 부활한 곳이자 성서의 무대인 이스라엘의 수도니까. 하지만 대부분의 중세인에게 예루살렘까지 가는 건 현실 적으로 매우 힘든 일이었다. 지금처럼 교통수단이 발달한 것도 아니니 더욱 어려웠다.
파리에서 예루살렘까지의 거리는 육로로 약 4,300킬로미터 정도다. 오늘날의 도로 사정으로도 최소 200일 이상 걸어야 하는 까마득한 길이다. 또 길이 멀고 험하기도 했지만 동시에 너무나 위험했다. 당시 예루살렘은 이슬람의 지배하에 있었기 때문이다. 이들은 기독교 순례객을 막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환대 하지도 않았다. 이 때문에 대안이 될 만한 다른 성지들이 인기 순례지로 부상한다. 주로 위대한 성인이 묻힌 곳이 대안이 되었다. 예를들어 예수의 열두 제자 중 한 명인 베드로 성인의 유해가 묻힌 로마, 마가복음의 저자로 알려진 마르코 성인의 유해가 모셔진 베네치아 등이 순례지로 큰 인기를 끌었다. 그리고 더 서쪽으로 가면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가 있었다.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의 경우 예수의 열두 제자 중 한 사람인 야고보 성인의 유골이 발견되면서 새로운 순례지로 주목받았다.
이 밖에도 다른 성인의 유해나 성물을 모신 곳이 각광받았다. 성물은 예수나 기독교의 성인과 관련된 성스러운 물건을 뜻한다. 예수를 매달았던 십자가, 그 십자가에 쓴 못, '말씀의 성인'인 성 안토니오의 턱뼈 같은 성물을 가진 도시가 속속 유력한 성지로 떠올랐다.
중세 신앙의 독특한 측면인 성물 숭배는 지금 우리의 상식으로는 이해하기 어렵다. 엄밀히 보면 우상 숭배를 금기시하는 기독교 교리와도 다소 맞지 않는 부분이다. 하지만 중세 기독교인에게 성물은 큰 관심 대상이었다. 어느 성당에 성모 마리아의 옷자락이 있다고 하면 많은 사람들이 그 성물을 보러 먼 길을 마다 않고 떠나는 게 전혀 이상하지 않은 세상이었다.
1000년 이후 찾아온 순례 열풍으로 중세 유럽 사회의 풍경은 이전과 많이 달라진다. 순례객이 지나는 길을 따라 하나둘씩 마을이 생기기 시작했고 이 마을들 중 일부는 큰 도시로 성장했다. 예나 지금이나 도시가 성장하려면 상업 활동과 서비스산업이 발달해야 하는데, 순례객이 모여드는 곳에 식당과 여관 등이 생기면서 중세도시의 상업 활동이 점점 더 활발해졌다. 모든 중세 도시가 순례객 때문에 생긴 것은 아니지만 이 시기에 일어난 순례 열풍이 중세 도시의 성장에 큰 자극이 된 건 분명하다.
특히 프랑스의 많은 도시가 이때 크게 발전한다. 당시 유럽 사람들에게 가장 인기있었던 순례지인 스페인의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에 가려면 반드시 프랑스를 거쳐야 했기 때문이다. 이때 생겨난 베즐레라는 도시는 프랑스 중부 내륙에 자리한 작은 마을이었지만 산티아고 데 콤포 스텔라로 가는 순례 열풍을 타고 크게 발전한다. 길이 직선으로 쭉 뻗어 있지 않고 구불구불한데 언덕 능선을 따라 자연스럽게 만들어 진 오솔길이다. 이 길은 베즐레가 자랑하는 성 마들렌 성당으로 이어지는데, 길이 먼저 생기고 도시가 그 길을 따라 양쪽으로 커 나갔다는 것을 잘 보여준다. 이처럼 산티아고로 가는 길 위에는 20-30킬로미터 간격으로 베즐레와 같은 순례자를 위한 도시들이 생겨난다.
스페인의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로 가는 순례길은 이 시기 순례객은 걷거나 마차를 타고 이동해야 했는데, 도보를 기준으로 하루에 이동할 수 있는 거리가 대략 그 정도였기 때문이다. 순례객이 머무는 장소마다 도시가 생겨난 것이다. 요즘 고속도로에도 30킬로미터 간격으로 휴게소가 있는 것과 비슷하다. 그러고 보니 고속도로 휴게소와 중세 마을은 비슷한 점이 또 한 가지 있다. 요즘 고속도로 휴게소들이 더 나은 서비스와 시설로 방문객을 끌려고 서로 경쟁한다는데, 중세 마을들도 순례객을 많이 끌어오려고 경쟁했다.
걷다 지지면 어차피 쉬어 가야 할 텐데 굳이 경쟁까지 할 필요가 있있을까 싶지만, 이왕이면 자기 마을로 와서 더 오래 머물기를 바랐던 것이다. 순례객이 상당한 돈벌이가 된다는 걸 깨달은 각 지역의 영주와 성직자들은 이들을 유치하려는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특히 순례객들이 성물에 큰 관심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고는 진귀한 성물을 얻기 위해 노력했다. 중세 순례 객들도 이왕이면 유명한 성물이 있는 도시를 거쳐 산티아고로 가려고 했다. 예를 들어 오툉이라는 도시는 나사로의 유골을 성물로 가지고 있었다. 나사로는 예수 그리스도가 살려낸 성인인데, 그래서 인지 이 성물도 치유의 기적을 발휘한다고 알려졌다. 소문이 퍼지자 아프고 병든 사람을 비롯해 많은 순례객이 오툉으로 향했다. 성물이 중요해지면서 이웃 마을끼리 성물을 훔치는 웃지 못할 일까지 벌어졌다. 훔친 측은 성인이 그걸 원했다고 둘러댔다. 비슷한 성물을 가진 도시들은 서로 자기 도시의 성물이 진짜라며 다투기도 했다.
이 시기 즉, 11~12세기, 이 때의 미술을 다른 이름으로 로마네스크 미술이라고 부른다. 로마의 영광을 알리는 웅장하고 거대한 석조 건물이 다시 유럽 땅에 지어지고 로마 건축이 보여주었던 독특한 아치도 되살난다. 로마네스크라는 용어 자체가 로마식, 로마풍이라는 의미다. 로마네스크 미술은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로 향하는 순례길에서 아주 독특한 건축과 새로운 조형 세계를 뽐낸다. 그 모습은 특히 조각을 통해 잘 드러난다.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는 '야고보 성인의 별이 빛나는 들판'이라는 뜻이다.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가 성지로 부상한 것은 갈리시아 지방 어딘가에 묻혔다고 전해오던 야고보 성인의 유해가 800년경에 이곳에서 발견되었기 때문이다. 야고보 성인의 유해가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에 있다는 말을 들은 사람들이 줄지어 모여들기 시작한다. 그 수가 얼마나 많았는지 프랑스, 독일, 영국, 이탈리아 등 유럽 각지에서 스페인 땅끝 마을인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까지 가는 길이 생기고 그 길을 따라 도시까지 생겼다.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로 가는 순례길의 경로는 매우 다양하지만 그 중 프랑스에서 출발하는 네 갈래 길이 유명하다. 흥미롭게도 이 길들은 이미 중세에 나온 가이드북'에도 소개되어 있다. 12세기에 산티아고로 가는 순례길이 대대적으로 유행하면서 충실한 여행 안내서가 몇 종류 나왔다. 그중에서 에메릭 피코Aymeric Picaud라는 수도사가 쓴 책이 유명 한데, 이 책에는 순례길 곳곳의 숙소뿐만 아니라 식당에 대해서도 소상하게 적혀 있어 중세판 미쉐린 가이드라고 불리기도 한다. 그 책에 따르면 프랑스에서 산티아고로 떠나는 순례길은 크게 네갈래다. 첫 번째 길은 파리에서 출발해 오를레앙과 투르를 지나는 길이다. 두 번째는 베즐레에서 시작해서 리모주와 페리괴를 지나고, 세 번째는 르퓌에서 시작해서 콩크와 무아삭을 거친다. 마지막 네 번째 길은 프랑스 남부의 아를에서 시작해서 툴루즈를 지나는 길이다. 이 네 길은 피레네 산맥을 넘어 스페인으로 들어가면서 모두 푸엔테 라 레이나에서 만난다. 이렇게 하나로 합쳐진 길은 산티아고 데 콤 스텔라로 들어간다. 지금이야 비행기나 기차를 타고 원하는 출발지까지 가서 순례를 시작하면 되지만 중세 시대에는 자신의 집 앞에서부터 오로지 두발로 걸어가야 했으니까 무척 힘든 여정이었다.
등짐을 지고 하루하루 걸어 산티아고에 가야 했고 순례를 마친 후에도 걸어서 집으로 돌아와야 했으니 최소한 몇 달, 길면 몇 년이 걸리는 엄청난 여정이었다. 프랑스 내륙을 가로질러 스페인까지 가는 거리만 해도 대략 800-900킬로미터여서 약 40일이 걸리고, 스페인에 들어가서 산티아고로 가는 길도 800 킬로미터나 되니 또 40일이 걸린다. 게다가 여행 중 도적을 만날 수도 있고 병들어 죽을 수도 있다. 이렇게 위험천만한 길이었지만 많은 중세인은 순례를 통해 구원을 받을 수 있다는 일념으로 용기를 내어 먼 길을 나섰다.
로마네스크 교회양식의 교회는 음향효과를 중시했다. 특히 그레고리안 성가로 미사를 진행한 중세에는 음향효과가 더욱 중요했다. 돌처럼 무거운 재료로 높은 건축물을 짓는 일은 매우 어려웠고, 그래서 고안한 방법이 아치와 2층 회랑이다. 기둥과 기둥 사이를 모두 아치 뼈대로 연결해서 무게를 버티게 했고, 회랑을 2층으로 만들었다. 이렇게 회랑을 2층으로 쌓아올리면 아치를 더 많이 활용하게 되어 석조 건축을 지탱할 수 있지만 한 가지 문제가 생긴다. 건물의 2층에 낸 창이 막혀버린다는 거다. 그래서 로마네스크 성당 안에 들어가보면 실내가 어둡다. 빛이 풍부하게 들어오지 못한다. 바실리카 건축의 특징이었던 밝고 명랑한 내부가 사라지면서, 어둡고 칙칙한 세계로 변한다. 물론 이 문제는 고딕 건축에서 해결된다. 고딕 건축은 내부가 거의 창으로 뒤덮여 있기 때문에 밝다. 초기 기독교의 바실리카에서 로마네스크, 고딕을 거치면서 건축의 내부가 밝아졌다 어두워졌다 다시 밝아지는거다. 또 로마네스크 양식은 지역성이 강하다. 통일된 양식이 없고 지역마다 개성이 강하다는 의미다.
전 유럽에서 순례자들이 몰려들자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도 거대한 교회가 필요해진다. 자연히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에서는 명성에 걸맞은 웅장한 건축 공사가 시작된다. 11세기 중반의 일이다. 11세기에는 시작만 했고 전체적인 형태는 13세기에 자리잡은 것으로 보이고, 현재와 같이 완성된 건 17세기에 이르러서이다. 멀리서 보면 높게 솟아오른 두 개의 종탑이 눈을 끈다. 이 종탑은 17세기 바로크 양식으로 지어졌고, 종탑의 뒤쪽 부분이 로마네스크 양식으로 지어진 성당이다.
안으로 들어가 광장에서 계단을 딛고 올라가면 정면 출입구가 보인다. 출입구로 들어가면 홀이 나오는데, 이 홀은 일종의 현관 역할을 한다. 산티아고 대성당의 방문객이 첫 번째로 접하게 되는 공간이다. 이 현관 아래에 여기에 아주 인상적인 조각들이 새겨져 있다. 순례자를 환영하는 천상의 조각이 새겨져 있어서 이곳을 '영광의 문'이라고 부른다.
안으로 들어가 광장에서 계단을 딛고 올라가면 정면 출입구가 보인다. 출입구로 들어가면 홀이 나오는데, 이 홀은 일종의 현관 역할을 한다. 산티아고 대성당의 방문객이 첫 번째로 접하게 되는 공간이다. 이 현관 아래에 여기에 아주 인상적인 조각들이 새겨져 있다. 순례자를 환영하는 천상의 조각이 새겨져 있어서 이곳을 '영광의 문'이라고 부른다.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 대성당 영광의 문에는 조각들이 빽빽하게 주로 예수와 성인들이 조각되어 있다. 입구의 아치와 문 사이에 있는 반원 모양의 영역을 팀파눔이라고 부른다. 산티아고 대성당 팀파눔에서 가장 크게 새겨진 조각은 두 손을 펼쳐 들고 있는 예수의 모습이다. 조각의 예수의 자세는 두 가지 의미를 지닌다. 우선 환영의 의미가 있다. 순례객을 반기는 의미에서 손을 들고 인사하는 거다. 또 한 가지 의미는 성혼, 즉 십자가에 못 박혔을 때 생긴 손바닥의 못 자국을 보여주는 것이다. 손바닥의 못 자국을 보면 이 조각을 예수 이 외에 다른 사람으로 착각할 리 없다.
예수를 둘러싼 네 인물은 마태, 마가, 누가 요한 성인을 뜻한다. 각기 자신의 상징인 천사, 사자, 황소, 독수리와 함께 있는 모습이다. 성인들 양옆으로는 채찍, 가시관, 홋, 십자가를 들고 있는 천사의 모습이 새겨져 있다. 이 물건들은 예수가 겪은 수난을 상징한다. 성경에 따르면 예수는 가시관 쓴 채 채찍질을 당하며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 언덕에 올라 그 십자가에 못 박혔기 때문입니다. 순례객은 수난의 상징물에 둘러싸인 채 손바닥을 들어올려 성흔을 드러낸 예수의 모습을 보고는 자신이 길에서 겪은 고행을 통해 예수가 겪었을 고통을 짐작하며 묵상했을 것이다. 그런데 아마 순례객에게 더 가깝게 다가왔던 사람은 그 아래 있는 야고보 성인일 것이다. 야고보 성인은 예수의 발 아래, 지팡이를 든 모습으로 조각되어 있다. 중세의 순례 객들도 야고보 성인처럼 지팡이를 짚고 먼 길을 걸어왔을 것이다.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 대성당에 무사히 도착한 순례객은 야고보 성인이 새겨진 기둥 아래에 손을 대고 잠시 감사 인사를 하고, 미사를 보고, 마지막으로 산티아고 대성당의 지하에 모셔져 있는 야고보 성인의 묘소를 참배한 뒤 길고 긴 순례 일정을 마치게 된다.
선임하사님의 카톡메시지를 보고 왜 산티아고 성당 영광의 문에 새겨진 조각상이 생각났는지는 알 수 없다. 조만간 목사 안수를 받는다는 이야기를 들어서일까? 아니면 나를 응원해주는 것에 대한 고마움일까? 여하튼 그 응원의 메시지에 힘입어 나도 일어나서 아침운동을 나선다. 조깅하는 동안 명절 3일 내내 마셨던 알코올을 오늘 모두 뽑아 내려고 애쓴다. 적어도 응원해 주는 사람의 선의에는 긍정적으로 반응해야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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